[이소연의 시적인 순간] 추위와 대비

입력 2025-01-15 17:45   수정 2025-01-16 00:29

“Turn off the air conditioner.” 호텔 방이 추워 프런트에 문의했더니 에어컨을 끄란 말을 들었다. 대만 여행 첫날부터 난관이다. 따뜻한 나라로만 알던 대만에서 이렇게 추위에 떨 줄은 몰랐다. 전기난로나 작은 온풍기라도 빌릴 수 있을까 기대했는데, 없다고만 한다. 그래도 대화 끝에 뭔가를 가져다주겠단다. 발음상으로는 무슨 컨버터라고 하는데, 온도 변환 장치 같은 게 있나? 5분 뒤, 호텔 직원이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이불이었다. 컴포터(comforter). 오리털 등을 넣은 두꺼운 이불이란 뜻도 있다는 걸 대만에 와서야 알았다.

북극발 한파가 아열대인 대만까지 내려오면서 지난 1일부터 11일까지 500명 가까운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얼마나 추우면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까 싶겠지만, 한파라고 해도 최저 기온이 영상 10도다. 며칠씩 영하로 떨어지는 한국 날씨에 비하면 그리 추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한국보다 더 추운 느낌이다. 나는 어째서 잠시 손만 꺼내 놓아도 손끝이 얼얼해지는 한국의 추위가 더 견딜만하게 여겨질까? 아열대 기후의 나라인 대만은 에어컨은 집마다 있지만 난방기구를 갖추지 않은 곳이 많다.

생각해 보면 서울은 버스정류장마다 ‘엉뜨’라고 부르는 온열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한파 가림막인 ‘추위녹이소’도 있다. 그뿐인가 밖에서 아무리 떨었더라도 어디든 실내로 들어서면 금세 온기가 돈다. 따뜻하게 데워진 몸으로 다시 추운 길을 걸어간다. 그래도 괜찮다. 이 길 끝에 발바닥부터 데워 줄 따뜻한 온돌 집이 있으니까. 추위는 추위에 대비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마음이 힘들고 아프다면 곧 그것에 대비하는 마음도 선물처럼 갖게 되겠지.

한국은 눈이 내린다고 한다. ‘눈’이라는 몸은 지워지기 위해 흩날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잠시 한국을 잊고 대만의 풍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백색테러 징메이 기념단지를 찾았다.

한쪽 벽에 커다란 붉은 글씨로 ‘공정염명(公正廉)’이라고 적혀 있다. 공평하고 올바르고 청렴하고 밝게 심판하겠다는 뜻일 텐데, 위조되고 잘못된 수많은 사건이 속출하면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했다고 한다. 당시 정치 피해자들이 감금되어 억울한 옥중 생활을 겪은 구역인 ‘인애루’의 풍경이 잊히지 않는다. 1949년 계엄령 발령 후 무려 38년 동안 이어졌는데 시리아가 경신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계엄령 기간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역사를 겹쳐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안내 데스크에서 한국어 음성 안내기를 대여해 설명을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여성 수감자의 생활에 대해 들으며 좁고 텅 빈 방들을 바라보았다. 여성 수감자들은 거의 야외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하루에 15분 정도 복도를 오가는 정도가 전부였다고 한다. 물수건 한 장으로 몸과 얼굴을 닦는 수감생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은 따뜻한 물이 든 양동이를 주어 몸을 씻게 했는데 그게 여성 수감자들의 힘든 수감 생활 속 소소한 행복이었다고 한다. 어떻게 생활하면 물 한 양동이가 행복이 될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온수가 쏟아지는 샤워기 말고, 겨우 몸을 씻을 만큼의 따뜻한 물 한 양동이를 떠올려 본다. 양동이 한가득 물이 하나의 거울이고 그 출렁거림을 보면서 행복해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섬광처럼 빛난다. 물의 냄새를 맡으며 얼굴을 씻은 사람들. 서로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으로 바라보았을 것이다. 그 힘으로 더 힘든 날들을 대비할 수 있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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