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차기 정부의 초대 국방장관으로 지명한 피터 헤그세스 후보자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말했다.
헤그세스 후보자는 14일(현지시간) 미국 상원 군사위원회 인사청문회에 앞서 제출한 답변서를 통해 “핵보유국으로서 북한의 지위와 핵탄두를 운반하는 미사일 사거리 증대에 대한 강도 높은 집중, 증대되는 사이버 역량은 한반도 및 인도·태평양 지역과 세계 안정에 위협이 된다”고 밝혔다.
북한은 지금까지 여섯 차례 핵실험을 했다. 핵탄두도 최소 수십 기를 보유한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가진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위반해 불법으로 핵무기를 개발해 온 만큼 정식으로 핵보유국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지 않는 태도를 취해 왔다. 지난 1기 트럼프 정부에서도 이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헤그세스 후보자의 서면 답변은 지금까지의 금기를 깼다는 점에서 미국의 대북정책 변화를 예고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차기 트럼프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 목표가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해 현 수준에서 핵무기 동결을 전제로 북한과 거래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지난해 라파엘 그로시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 사실을 인정하고 대화에 나서야 한다”고 발언한 것과 비슷한 접근이다.
헤그세스 후보자는 이날 청문회에서 동맹국과의 관계 강화를 언급하면서도 동맹국이 더 많은 안보 비용을 분담해야 한다는 기조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동맹국 방위비 부담 강화도 언급, 주한미군 규모·역할 달라질 수도
그가 사용한 핵 보유국 표현은 국제법으로 핵무기 개발과 보유를 인정받은 미국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5개 ‘핵무기 국가(nuclear weapon state)’와는 다르다. 하지만 금기를 깬 점에서 미국의 대북 정책 변화를 예고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한반도 비핵화 원칙엔 변함이 없다”고 강조하며 혼란을 수습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가안보소통보좌관은 이날 외신센터 기자회견에서 “그 사안(북핵)에서 우리 정책은 변한 것이 없다”며 “차기 안보팀이 이를 어떻게 규정할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조 바이든 정부)는 이를(북한 핵 보유국 지위) 인정하는 데까지 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도 같은 기조를 확인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북한 비핵화는 한·미·일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일관되게 견지해 온 원칙”이라며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상 북한은 절대 핵 보유국 지위를 가질 수 없다”고 밝혔다. 국방부 관계자도 “한·미는 긴밀한 공조 아래 북한 비핵화 목표를 견지하고 있다”며 “북한 핵 보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은 불변”이라고 했다.
헤그세스 후보자가 북핵 문제 인식이 부족해 벌어진 해프닝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벤자민 엥글 단국대 초빙교수는 북한 전문 매체 NK뉴스에 “미국의 접근 방식이 변화한 것을 확인하려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이 용어를 반복해 사용하는 것을 봐야 할 것”이라며 “(이번 언급이) 헤그세스의 경험 부족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양당은 비핵화를 거론하지 않은 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해명했지만 이 문제가 관심 밖으로 밀려난 결과라는 점은 분명하다. 조현동 주미대사는 작년 10월 국정감사에서 “미국 내에서 북한 비핵화 회의론이 커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대선 전 트럼프 캠프는 북한 비핵화 목표가 현실적이라고 판단해 북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대가로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정보원도 차기 트럼프 정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를 통해 핵동결이나 군축 협상으로 ‘스몰딜’에 합의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난 13일 국회에 보고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면 핵무기 일부 폐기, 핵능력 시설 일부 폐쇄 등 북한 핵능력을 인정하고 몇몇 능력만 줄이거나 차단하는 핵군축 담판 협상으로 이어진다. 우리 대북정책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헤그세스 후보자 발언이 지난해부터 워싱턴 조야에서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자는 주장이 잇따르는 가운데 나온 만큼 단순 해프닝으로 치부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두진호 한국국방연구원(KIDA) 한반도안보연구실 연구위원은 “미국은 북한의 핵 보유국 지위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라며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과 북한 핵군축 협상을 통해 노벨평화상을 받는 일에 더 관심이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또 “인·태 지역 등 전 세계에 배치된 미군 태세를 재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주한미군 규모와 성격도 이에 따라 바뀔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주한미군이 꼭 줄어드는 방향이 아닐 수 있으며 육군 중심(약 70%)에서 해군력이나 공군력을 강화하는 쪽으로 나아갈 것이란 견해도 나온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김동현 기자 sel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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