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빵 바지에 베레모 쓴 빈민가 악동들…프랑스 혁명군 선봉에 섰다

입력 2025-01-16 17:12   수정 2025-01-16 17:13


19세기 가난한 노동자와 빈민 거주 지역이었던 파리 북동쪽에 있는 몽마르트르, 벨빌, 메닐몽탕에 살던 아이들을 티티 파리지앵(Titi Parisien)이라고 불렀다. 티티 파리지앵은 프렌치 베레모를 쓴 채 아버지와 형에게 물려받은 크고 해진 바지를 멜빵으로 잡아맨 수완이 좋고 골목길 구석구석을 자기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잘 알고 있는 파리에서 태어난 장난꾸러기 아이들이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농업과 수공업이 지배적이었던 사회는 상업과 산업사회로 역사적인 전환 시기가 됐다. 그로 인해 파리 외곽과 근교에 설립된 수많은 공장에는 무일푼의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일하게 됐다. 그들은 학교를 가기도 하고, 가족을 돕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무리를 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주저하지 않고 훔치기도 하며, 농담과 장난을 일삼았다. 이후 20세기 초에 들어 파리의 특유 속어를 사용하는 노동자 계급의 성인들을 티티 파리지앵이라고 부르게 됐다.
첫 번째 티티 파리지앵 ‘가브로슈’
프랑스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대표적인 소설 ‘레 미제라블’에서 장 발장은 가난 때문에 빵을 훔쳐 19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출감 후 수도원에서 은식기를 훔쳤다가 수녀들의 용서에 감동해 선을 행하고 불쌍한 코제트를 구하며 평생을 희생한다.

레 미제라블에서 코제트를 노예처럼 부려 먹고 양육비를 받아 가로챈 테나르디에 부부의 큰아들 가브로슈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거리에 내몰려 고아처럼 생활하지만, 관대하고 수완이 좋은 첫 번째 티티 파리지앵이다.

가브로슈는 겉으론 자유분방하며 때로는 무례하게 보이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내심은 정이 깊고 쾌활한 성격이다.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나면서 혁명군에 합류하는데 혁명군 측에 총알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를 듣자, 가브로슈는 겁 없이 바리케이드 밖으로 나가 시신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총알과 화약을 주우러 나서기도 하는 정의로운 소년이었다.
자유를 외치는 용감한 아이들
위고는 프랑스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걸작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에서 영감을 얻어 가브로슈를 탄생시켰다. 루브르랜스박물관에 소장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프랑스 혁명을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 많은 사람이 1789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 프랑스 대혁명을 생각하지만, 사실은 1830년 7월에 일어난 두 번째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자유의 여신 마리안느는 프랑스 삼색기를 들고 전진하고, 그녀의 오른쪽에는 두 손에 소총을 들고 소리치는 팔각형 베레모를 쓴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의 모습이 위고가 영감을 얻은 티티 파리지앵, 바로 가브로슈다.

위고는 1830년 혁명군과 함께 바리케이드에서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용감한 소년들을 보고 ‘이 작고 큰 영혼’이라며 존중했다. 티티 파리지앵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면 어떤 위험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걸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사진까지…레트로 스타일 찾기
‘빨간 풍선(Le Ballon Rouge)’은 알베르 라모리스 감독의 프랑스 사실주의 단편 영화로 1956년 개봉됐다. 34분짜리의 이 영화는 빨간 풍선과 어린 소년 파스칼의 모험 이야기다. 아카데미에서 단편 영화로는 최초로 최우수 각본상을 받았고 칸 영화제 단편 영화 부문 황금종려상을 비롯해 많은 상을 받았다. 빨간 풍선은 마치 애완견같이 파스칼을 따라다니는데, 파리의 서민주택가 벨빌·메닐몽탕의 티티 파리지앵들이 그 풍선을 빼앗고 결국 터트려 버리고 만다. 그러나 파리 곳곳의 풍선이 파스칼에게 날아와 풍선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해피엔딩의 동화 같은 서정적인 영화다.

레 미제라블에 나오는 가브로슈가 쓰고 다니던 팔각 베레모는 이후 가브로슈 캡이라고 불리게 됐다. 가브로슈 캡은 일반 베레모보다 더 복고풍 스타일이다. 1800년대 베레모와 가브로슈 캡을 쓴 아일랜드인이 미국으로 대규모 이민을 갔다. 이후 19세기와 20세기 초 미국의 대도시에서 신문을 파는 청소년들이 가브로슈 캡을 착용해 ‘뉴스보이 캡’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기말 영국 버밍햄을 기반으로 활동한 갱단의 이야기를 다룬 BBC 드라마 시리즈 ‘피키 블라인더스’ 방영 이후 영국의 베레모와 가브로슈 캡 판매율이 25% 이상 높아졌다고 한다. 티티 파리지앵의 유니폼이었던 프렌치 워크 재킷이 몇 년 전부터 트렌디한 룩으로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기 시작했다. 가브로슈 캡과 프렌치 워크 재킷, 양복 조끼, 그리고 워커 슈즈 앵클부츠는 멋쟁이의 캐주얼 패션 데일리 아이템이 됐다.
티티 파리지앵에서 이민 파리지앵으로
티티 파리지앵이라는 표현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조금씩 사라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미셸 오디아르의 영화에서, 생 마르탱 운하의 호텔 듀 노르에서, 빈민촌 벨빌에서 태어난 에디트 프아프의 삶에서, 그리고 영화 ‘아멜리에’의 몽마르트르에서 티티 파리지앵을 만날 수 있었다.

티티 파리지앵이 모여 살던 곳에는 어느덧 아프리카와 아랍, 아시아 이민자들이 자리 잡게 됐다. 또한 이 지역에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회 계급과 경제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예술가와 ‘보보 파리지앵(bourgeois bohme의 줄임말)’이 안착하면서 가난한 이민 계층과 공존하는 지역이 됐다.

파리=정연아 패션&라이프스타일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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