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제17회 쇼팽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은 줄곧 한 가지 소신을 밝혀왔다.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니라, 대중들이 클래식에 익숙해져 대중의 클래식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조성진의 주장 이후 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설명대로 클래식을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장르로 변모시키기보다는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상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의 주장을 믿고 있다. 그로부터 10년, 조성진은 도이치 그라모폰 전속 아티스트, 베를린 필하모닉 상주 음악가 등 눈부신 경력을 쌓으며 차세대 음악가들의 롤모델이 되었다.
올해는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1875~1937) 탄생 15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조성진은 라벨의 피아노 전곡을 담은 앨범을 발매했으며, 베를린 필하모닉 상주 음악가로 선정되었을 당시 직접 선택한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그는 이 프로그램을 들고 1월 23일 독일 에를랑겐을 시작으로, 빈을 거쳐 미국 보스턴과 뉴욕, 베를린, 그리고 한국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리사이틀 투어를 펼친다.
지난 1월 25일,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리사이틀을 통해 그는 ‘대중의 클래식화’라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해 보였다. 비교할 수 없는 정제된 연주와 흔들림 없는 집중력으로, 조성진은 라벨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이번 무대를 완성했다.
완벽한 집중력과 절제된 감정의 연주
빈 콘체르트하우스 대공연장 무대에 등장한 조성진은 차이나 수트를 차려입고 당당히 걸어나왔다.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첫 곡 세레나데 그로테스크의 첫 음을 울리며 긴 여정을 시작했다. 세레나데 그로테스크는 1893년, 라벨이 작곡한 초기 작품으로, 강렬한 리듬과 익숙하지 않은 조성 변화가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조성진은 첫 곡부터 체력 안배 없이 거침없이 건반을 내달렸다. 이어 연주된 고풍스러운 미뉴에트에서는 과거와 현대적 감각이 공존하는 조화를 섬세한 터치로 표현해냈다.
그러나 이날 공연에서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은 세 번째 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도중에 찾아왔다. 공연장 한쪽에서 갑작스럽게 휴대전화 음원이 몇 초간 재생되는 사고가 벌어졌던 것. 객석이 웅성거리며 공연이 중단될 것 같은 순간이 있었으나, 조성진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연주를 이어갔다. 그는 무대 위에서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방해 속에서도 라벨이 의도한 음악을 차분하고 서정적인 분위기로 그려냈다. 1부 마지막 곡인 물의 장난과 소나티네까지 연주를 마친 후 퇴장할 때까지도 조성진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기침 소리, 휴대전화 소음 등 크고 작은 ‘관크’(관객방해)의 순간이 있었지만, 그의 연주는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초인적 체력으로 완성한 라벨음악의 서사
2부에서는 거울과 밤의 가스파르가 연주되었다. 라벨 특유의 화려한 색채감과 난해한 기교가 요구되는 이 두 작품에서 조성진은 두 손을 부드럽게 교차시키며 유려한 흐름을 그려냈다. 특히 밤의 가스파르에서 요구되는 초인적인 난이도를 탁월한 테크닉으로 해결하며, 작품이 지닌 신비로운 분위기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두 번째 인터미션을 지나 3부에 접어들자, 일부 관객들은 체력과 집중력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성진은 흔들림 없이 마지막 곡 쿠프랭의 무덤까지 완주했다. 마지막 6악장 토카타에서는 한 치의 실수도 없이 마무리하며, 3시간 동안 지속된 라벨의 여정을 완벽한 피날레로 장식했다.
그가 만든 역사적인 밤
이날 조성진은 1893년부터 1917년까지 라벨이 작곡한 13곡, 총 21개 악장을 3시간 동안 완주했다. 공연이 끝난 후, 청중들은 그가 보여준 정숙하고 흔들림 없는 연주에 매료되었으며, 그의 한계를 초월한 집중력에 충격을 받았다. 박수갈채가 쏟아졌지만, 조성진은 앙코르 없이 피아노 뚜껑을 닫고 퇴장하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현장에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비롯해 호텔신라 이부진 대표 등 다양한 관객들이 객석을 메웠다. 연휴를 맞아 한국에서 빈까지 직접 찾아온 국내 팬들도 눈에 띄었다. 공연 후 로비에서 열린 팬 사인회에는 전 세계에서 온 그를 응원하는 관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현장에서 판매하던 그의 앨범은 일찍이 완판되었다.
라벨 전곡 연주라는 도전적인 프로그램을 선택하고, 그 여정을 흔들림 없이 완주한 조성진. 그의 음악을 통해 클래식의 대중화가 아닌 ‘대중의 클래식화’라는 흐름이 확실히 자리 잡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빈=조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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