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우크라이나 군사 원조를 중단한 지 몇 시간 만에 우크라이나가 백기를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달 28일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공개 설전을 벌이며 파행이 된 지 나흘 만이다. 우크라이나로선 종전 이후 안전 보장을 위해 미국 방위력에 기대야 하는 데다 유럽 동맹국도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압박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결국 “평화 협상에 나설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독립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도움을 줬는지 깊이 감사하고 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재블린 대전차 미사일을 제공했을 때 상황이 변한 것을 기억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백악관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JD 밴스 부통령이 미국 지원에 제대로 감사를 표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데 대한 반응으로 풀이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파행으로 끝난 양국 정상회담에 유감을 표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열린 회담은 기대하던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는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앞으로의 협력과 소통이 더욱 건설적이길 바란다”고 적었다.
미국의 군사 원조 중단이라는 유탄을 맞자 젤렌스키 대통령이 공개 사과로 사태 수습에 나선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 동맹국들의 압박도 영향을 미쳤다. 회담 이후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백악관으로 돌아가라”고 설득했고, 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무총장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트럼프 대통령과 화해할 것을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이어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모든 원조 물자 수송을 중단하자 우크라이나는 미국이 제안한 종전 협상안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까지 갔다. 뉴욕타임스(NYT)는 “미국의 군사 지원 전면 중단은 이례적이며 본질적으로 최후통첩이었다”고 했다.
광물 협정은 미국이 그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한 대가로 우크라이나에 매장된 전략 광물 개발권을 확보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광물 협정을 자신이 주도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협상의 필수조건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 서한에 만족감을 나타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광물 협정 체결 사실을 발표하고 싶다는 뜻을 참모진에게 피력한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한을) 조금 전에 받았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이어 “우리는 러시아와 진지한 논의를 해왔고, 그들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준비돼 있다는 강력한 신호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부분 휴전안에 긍정적 반응을 내놨다. 그는 “1단계로 포로 석방과 공중에서의 휴전, 즉 미사일·장거리 드론·에너지와 민간 인프라 공격 금지, 해상에서 즉각적인 휴전을 즉시 시행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다만 러시아도 이에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 방안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일간 르피가로 인터뷰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의 공중·해상 및 에너지 인프라 부문에 대한 1개월 휴전 계획을 공동 제안했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만 저자세로 돌아선 젤렌스키 대통령을 향해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비판적인 목소리도 나온다. 올렉산드르 메레시코 우크라이나 의회 외교위원장은 로이터통신에 “누가 봐도 이건 정말 안 좋은 상황”이라며 “그(트럼프 대통령)가 우리에게 항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꼬집었다. AFP통신도 “키이우 시민과 전선의 병사들은 충격에 빠지고 배신감에 휩싸였다”고 전했다.
한경제/이소현 기자 hanky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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