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1980~1990년대만 해도 최상위권 인재들의 꿈은 서울대 물리학과 입학이었다. 1990년 정시 지원 점수를 기준으로 매긴 자연계열 학과 순위는 서울대 물리학과, 컴퓨터공학과, 의예과, 전자공학과, 미생물학과 순이었다. 2위 의대인 연세대 의예과는 11위에 머물렀다.
1990년대 말부터 변화가 감지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평생직장’은 없다는 인식이 확산했고, 자격증을 따면 평생 먹고살 수 있는 의대로 우수 인재가 몰리기 시작했다. 2000년 기준 상위 7개 학과는 의대와 한의예과가 차지했고, 서울대 건축학과가 그 뒤를 이었다.
경기 침체와 저성장 국면이 장기화하면서 쏠림현상은 더 심해졌다. 2024년 기준 국어·수학·탐구영역 백분위를 기준으로 자연계열 상위 22개 학과 중 서울대 수리과학부(16위)를 제외하고 모두 전국의 의대·치대·약대가 싹쓸이했다. 서울대 물리학과는 제주대 약대나 수의예과보다 입학 점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정부의 의대 2000명 증원 결정은 의대 쏠림을 심화시켰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 취업이 사실상 보장된 반도체 계약학과(기업 요구에 따라 교육과정 운영)도 의대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있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권 5개 대학 반도체 계약학과 정원은 77명이었는데, 등록을 포기한 학생이 138명으로 정원의 178%에 달했다.
‘의대 블랙홀’에 기초 학문을 연구하는 자연계열 주요 학과가 외면받으면서 과학 기술계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이들 기초 학문이 AI를 포함한 첨단산업의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공대 출신 한 대학 총장은 “‘초등 의대반’이 성행하는 것은 정상적이지 못한 사회”라고 지적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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