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식이다. 딸 로자(셀레스트 브룬켈 분)의 남자 친구 유제프(모하메드 루리디 분)는 날마다 그녀 집에서 자고 간다. 멀쩡한 계단을 놔두고 그녀의 아빠 에티엔(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의 눈을 피해 2층 창문으로 기어 올라가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그러면서도 둘은 육체적 관계를 하지 않는다. 로자는 아빠 에티엔에게 유제프와의 첫 경험 얘기는 꼭 공유하겠다고 말한다. 로자가 유제프와 자지 않는 이유는 아빠가 상심할까 봐여서다. 에티엔과 로자 부녀는 특별하다. 로자는 에티엔을 아빠 이상으로, 삶의 동반자이자 반려자로 사랑한다. 그렇다고 이성으로까지는 아니다.
로자는 그림을 잘 그린다. 프랑스 동북부 예술전문대학인 메스에 입학 허가를 받은 참이다. 로자의 그림 실력은 엄마 발레리의 유전자 덕인데, 발레리는 에티엔과 하룻밤 정염으로 로자를 낳은 후 갓난아기일 때 부녀를 버리고 떠났다. 이 가족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빠 에티엔은 해안 작은 도시의 시청 아마추어 축구단 코치로 살아가며 택시기사인 엘렌(모드 와일러 분)과 사귀는 사이다. 에티엔은 혼자 이를 악물고(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딸아이를 키워냈다. 당연히 너무 힘들고, 너무 외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딸아이 로자를 위해 삶을 견뎠다. 열여덟 살 된 로자는 그걸 잘 알고 있으며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굴지만, 자신이 대학으로 떠나면 아빠는 어떻게 될까,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린다.
영화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랑은 언제나 사라지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사라지지만 사라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건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육체적 관계나 물질적인 무엇 등등 때문은 절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에티엔과 로자 부녀는 행복했고, 행복하다.
영화가 꽤 시적인 이유는 일단 로자 남친 유제프 때문이다. 그는 시를 쓴다. 서사가 있는 대하시(마치 시인 신동엽의 작품처럼)를 쓰고 싶어 한다. 그 소재는 이 부녀의 비극적인 삶이다. 유제프는 밥상머리에 앉아 에티엔에게 반 고흐의 말을 빌려 이렇게 얘기한다.
“언젠가 우리는 냉소주의와 회의주의의 농담에 질려서 좀 더 음악적으로 살기를 바랄 것이다.”
에티엔은 유제프의 이런 말들에 다소 황당해한다.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제프가 자신과 딸의 얘기를 시로 쓰는 것에는 반대한다. 영화는 이런 톤 앤드 매너를 잘 끌어간다. 삶이란 것이 워낙 울퉁불퉁하고 길고 긴 여정이어서인지 살아가면서 때로 ‘시처럼 대화하는 게 뭐 어떠냐’ 하는 느낌이 든다. 우리 삶에는, 특히 지금 시가 필요하다.
에티엔은 우연히 TV에서 로자의 친엄마 발레리의 모습을 본다. 너무 멀쩡한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애인 엘렌은 이런 에티엔의 마음에 변화가 생겼음을 감지한다. 딸의 기숙학교 입학으로 이사 준비를 하는 에티엔을 찾아온 엘렌은 남자를 장난치듯 이삿짐을 넣을 큰 상자에 집어넣는다. 남자는 자기도 이 포장 물건들과 함께 버려 달라고 말한 참이며, 더 이상 뭐가 뭔지 모르겠다며 우울해한다. 영화에서 이 장면이 가장 좋았다. 엘렌은 말한다. 그건 언젠가 에티엔이 엘렌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상냥하게 대해 줘 / 눈물이 마르길 원해 / 모나지 않는 사랑을 원해 / 직각은 이제 그만 / 상처도 그만 / 충격받는 일도 그만 / 곁눈질도 그만 / 형식적인 입맞춤도 그만 / 우리만의 열정을 만들어 내길 바라 / 오직 우리만의 / 사라지지 않는 심오한 기쁨”
주인공들은 ‘중세시대의 궁정 연애’ 같은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대화에는 운율이 있다. 마치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초원의 빛’을 읽고 보는 느낌을 준다. 그 시처럼 이 영화는 불멸의 낭만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 오히려 강한 힘으로 살아남아’ 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낭만의 서정주의는 어두운 시대와 세상에 한줄기 초원의 빛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시대의 의지는 어쩌면 서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랑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래서 좋은 영화임을 넘어 필요한 영화다. 따뜻하다. 그게 어디인가. 2023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 폐막작이었다. 지난달 26일 개봉돼 작은 극장가에서 관객을 기다리는 중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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