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관세전쟁 영향으로 추락했던 2차전지주가 또다시 암초를 만났다. 공매도가 전면 재개되며 주가 변동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2차전지주는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 수준)이 높고 대차거래 잔액 규모가 시총 대비 커 공매도에 취약하다. 증권가는 올 1분기 2차전지 기업들의 실적도 전분기 대비 악화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당분간 주가 반등을 노리긴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1년 5개월 만에 공매도가 재개된 첫날인 3월 31일 2차전지와 바이오 종목들은 장 초반부터 공매도 매물이 쏟아지며 큰 폭으로 추락했다. 이날 에코프로, 포스코퓨처엠, 에코프로비엠, 에코프로머티, 엘앤에프 등이 줄줄이 52주 신저가를 찍었고 LG에너지솔루션, SK이노베이션, 삼성SDI, POSCO홀딩스, LG화학 등이 4~7%가량 줄줄이 내렸다.
작년 한 해 동안 LG에너지솔루션(-19.06%), 삼성SDI(-49.26%), 에코프로비엠(-63.37%), SK아이이테크놀로지(-71.99%) 등 주요 2차전지주는 전기자동차 업황 부진으로 큰 폭으로 하락했다. 올 1~2월 LG에너지솔루션과 에코프로비엠은 최대 11%, 33% 반등하며 투자심리가 살아나는 듯했지만 이달 들어 상승폭을 대부분 반납하고 연초 수준으로 주가가 내려앉았다. 삼성SDI는 20만원 선이 깨지며 52주 신저가를 찍었고 작년 말 40만원 선을 넘나들었던 LG에너지솔루션도 30만원대로 주저앉았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업황 부진과 중국 경쟁 업체의 약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책 리스크 등 불확실성이 여전해 당분간 2차전지주 투자에 주의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유럽 전기차 판매가 늘어날 것이라는 일부 긍정적 전망도 있지만 반도체 등 다른 업종 대비 투자 매력도가 낮다는 것이다.
증권가에선 올 1분기 2차전지 업종의 실적이 전분기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작년 2분기부터 주요 고객사인 글로벌 전기차 제조사(OEM)들이 본격적인 재고 조정에 나서면서 ‘수요 절벽’ 현상이 지속되고 있어서다. 배터리셀 및 소재 등 가치사슬 전반에 걸쳐 누적된 악성 재고도 걸림돌로 지적된다. 정진수 흥국증권 연구원은 “전기차 수요 절벽의 정점을 1분기로 예상하지만 파급 효과의 시차를 고려하면 재고 조정 영향권을 상반기까지 열어둘 필요가 있다”며 “기업별 최대 전분기 대비 20% 매출액 감소가 예상되며 상당수 기업의 배터리 관련 사업 부문을 영업손실로 추정한다”고 밝혔다.
다만 재고 조정 기간이 2년 이상 장기화하진 않을 것이란 의견이 많다. 이번 재고 조정이 경기순환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수요 예측 실패로 인한 능동적 조정의 성격이 강하는 점에서다. 전기차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산업 특성상 2차전지의 재고 조정 기간은 일반적인 4년 주기의 제조업 재고 사이클보다 단축될 수 있다”며 “올 2분기부터 재고 조정의 중간 성과가 확인되면 반등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투자업계는 2차전지 수요 저점을 파악하는 중요한 신호로 ‘되돌림 수요’를 꼽는다. 되돌림 수요란 가격이 일시적으로 내려갈 때 수요가 회복되거나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2차전지 제조사의 경우 작년 4분기 실적이 저조했던 기업들은 기저효과로 인해 실적이 회복될 가능성이 크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스코퓨처엠이다. 핵심 고객사의 공격적인 재고 조정으로 타격을 입었던 이 회사는 1분기부터 출하량이 일부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가치사슬 중에선 원통형 전지가 그나마 회복 가능성이 높은 분야로 꼽힌다. 원통형 전지 매출은 2023년 하반기 바닥을 찍은 이후 반등하는 추세다. 올 상반기 LG에너지솔루션이 테슬라의 모델Y에 새로운 원통형 배터리 ‘뉴 2170’을 공급하며 본격적인 매출이 발생한다는 점도 반등 모멘텀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배터리 업계는 올해부터 새로 가동되는 신공장이 수요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혼다 조인트벤처(JV) 신규 공장과 스텔란티스 JV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 리모델링 중인 미시간 공장이 재가동되면 하반기부터 양산이 본격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삼성SDI도 스텔란티스와 생산량 확대를 진행 중이다. LG에너지솔루션 관계자는 “신형 모델Y의 글로벌 인도 일정이 당초 예상 대비 앞당겨지면서 3~4월 신제품 초기 수요가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며 “소형 전지 부문은 지속적인 실적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니켈과 리튬 등 배터리 가격을 결정하는 주요 원자재 가격이 안정되고 있다는 점은 2차전지 업계에 긍정적이다. 원자재 가격은 작년 4분기부터 하향 안정화된 후 박스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증권사들은 상반기 배터리셀 및 소재의 가격과 판매량에 대한 전망을 일제히 하향 조정하고 있다. 부진한 수요와 과잉 재고가 배터리셀 가격 하락을 압박하고 있어서다. 수요 환경 악화와 저조한 재고 회전율을 감안했을 때 실적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전문가들은 2차전지 관련 기업 중에서도 규모의 경제를 갖추고 제조 공정 혁신에 성공한 곳에 주목하라고 조언했다. 중국 업체들이 유럽 전기차 시장에 침투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가격 경쟁력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배터리셀 기업의 유럽 생산 능력은 약 180GWh로 30%의 시장점유율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중국과 유럽 기업들의 증설로 인해 중장기적으로 15%까지 축소될 전망이다. 정 연구원은 “기업 가격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할 수 있거나 중국과의 가격 경쟁 영향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 신기술에 주목해야 한다”며 “전기차 가치사슬 내 주도권을 가진 대형 배터리셀 기업을 중심으로 46시리즈 배터리 가치사슬, 건식공정, 실리콘 음극재 등의 신기술 가치사슬과 동박, 전구체 등에 선제적으로 투자한 기업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했다.
46시리즈 배터리는 셀 개수가 4분의 1로 줄어들어 부품과 패키징 간소화를 통해 비용 절감 효과가 큰 것으로 알려졌다. 건식 공정은 기존 습식 공정 대비 전극 제조 비용을 최대 30% 절감할 수 있다. 증권가는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SK넥실리스 등 말레이시아에 생산 거점을 확보하고 동박, 전구체 등 원재료를 생산하는 기업들을 추천했다. 전력 소모량이 많은 동박 산업은 국내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 값싼 전기요금으로 생산 비용을 줄인 중국 기업들이 저가 동박으로 물량 공세를 펼치고 있어서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과 국내 동박의 가격 차이는 30배에 달한다. 말레이시아는 인프라 비용이 저렴해 중국산과 가격 차이가 10배로 좁혀진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산 동박의 글로벌 가격 경쟁력이 약화하고 국내 동박 업체들이 중국 배터리셀 기업의 해외 거점 공급망에 편입된다면 소재 기업들이 증시에서 다시 주목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 수입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중국 전기차 규제 움직임은 ‘K배터리’에 호재가 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10월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5.3%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미 중국산 전기차에 100% 관세를 매기고 있는 미국 또한 추가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K배터리가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배터리 업계는 유럽을 중심으로 전기차 판매량이 늘어나는 추세에 기대를 걸고 있다. 지난해 유럽 순수 전기차(BEV) 판매량은 3% 감소했지만 올해는 10%가량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현수 하나증권 연구원은 “양극재 수출이 작년 말 1년 3개월 만에 일시적으로 반등하는 등 긍정적인 수치들도 나타나고 있다”며 “실적이 개선되면 빠르게 정상화될 대형 2차전지 종목 중 밸류에이션 매력이 커진 기업에서 기회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예진 한국경제 기자 ac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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