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캠퍼스 잡앤조이=박해나 기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시족’이 가장 많이 모여 있다는 서울 노량진. 합격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에 열중하는 수험생으로 가득한 곳이다. 강의실 명당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학원 앞에서 줄을 서는 것은 기본이고,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새 정부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 정책으로 노량진 고시촌에는 공시족이 더 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p >
<p >
<p >△ 노량진 학원가에서 공부 중인 공시족
<p >노량진 살이는 퍽퍽하다. 학원가의 월세 가격은 평균 3.3제곱미터 당 13만 7천원 수준으로 강남보다 높다. 3평 남짓의 원룸은 월세 50만 원 이상이다. 지하방도 40만 원 후반, 고시원도 30만 원이 훌쩍 넘는다. 여기에 학원비, 독서실 이용비, 식사비 등의 생활비를 합치면 한 달에 150만 원 이상을 쓴다. 모아둔 돈이나 벌이가 없으니 부득이하게 생활비는 부모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다반수다. ‘등골 브레이커의 끝판왕’이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p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부담감을 안고 합격을 위해 수험 생활에 올인한다. 쇼핑도, 친구도, 여가도 합격 후로 미룬다. 하지만 수험생활이 길어지면 초심을 잃게 되고, 처음의 굳건했던 의지가 사라진 자리는 외로움으로 채워진다. 외로움은 특히 혼자 밥을 먹을 때 배가 된다는데, 노량진에 유독 혼자 밥 못 먹는 남자가 많은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을까.
<p ># ‘밥 친구 구해요’ 글 올리자 남자들 댓글 폭주
<p >유명 공시족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각종 스터디원을 모집하거나 중고서적 등을 거래하는 글이 자주 올라온다. ‘노량진에 유독 혼자 밥 못 먹는 남자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글을 하나 올렸다. ‘밥을 함께 먹을 친구를 찾는다’는 내용이다.
<p >글 작성자가 여성이라는 것을 친절히 명시하고, 남녀 상관없이 함께 식사를 하길 바란다고 적었다. 혼자 밥 먹는 것이 누구보다 익숙하고 편할 고시생들이 과연 낯선 사람과 밥 친구를 해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몇 시간 후 다시 접속한 커뮤니티, 기자가 올린 글은 조회수 폭발, 댓글 폭주로 최고 인기글이 돼있었다.
<p >
<p >△ 밥터디 모집글의 조회수, 댓글수가 특히 많다
<p ><i>‘안녕하세요. 26살 남자 공시생이에요. 노량진 온지 얼마 안돼 외롭기도 해 친구하고 싶어요.’</i>
<p ><i>‘주말에만 같이 밥 먹을 수 있을까요?’</i>
<p ><i>‘다른 남자들 다 무시하고 저랑 밥만 먹고 헤어집시다’</i>
<p ><i>‘30살 남자입니다. 수험 정보 이야기하면서 친하게 지내요’ </i>
<p >글을 게시했던 이틀간 총 19명이 이름도 성도, 얼굴도 모르는 기자와 함께 밥을 먹기를 원했다. 철벽처럼 닫혀있을 것 같던 공시생이 이렇게 오픈마인드일 줄이야. ‘노량진 공시생’, ‘여성’이라는 키워드만 있으면 이렇게 쌍수 들고 환영해주는 것을. 게다가 이들은 모두 남자다.
<p ># 밥 친구하자더니 ‘커피 마시자’, ‘밤에 만나자’
<p >댓글을 단 19명의 남자 중 심사숙고해 6명에게 연락을 했다. 이들은 인사 메시지 하나에도 반가움을 가득 담아 표현하며 노량진 초보 공시족 기자를 환영했다. ‘어느 직렬을 준비하느냐’, ‘어디 사느냐’는 공통질문처럼 반복됐다. ‘다른 남자들과도 연락을 하냐’는 질문도 여러 번 받았다. 모두 비공개 댓글을 달아 서로가 남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음에도 그들은 본능적으로 댓글을 단 사람이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은근히 경계도 했다. 밤낮없이 연락하는 그들을 보며 ‘도대체 공부는 언제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p >기자는 밥터디(홀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식사만 같이 하고 다시 각자의 공부에 전념하는 방식) 개념으로 식사메이트를 찾았다. 하지만 댓글남 대부분이 ‘오후에 차를 한 잔 하자’거나, ‘저녁 8시 이후 만나자’고 했다. 정작 점심을 같이 먹자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요새 노량진 공시족은 밥을 혼자 먹는 것뿐만 아니라 카페에서 커피를 혼자 마시는 것마저도 쑥스럽고 어려워하나보다.
<p >
<p >
<p >△ 밥터디 모집글에 댓글을 단 사람들
<p ># 노량진에서 만난 댓글남
<p >오전 10시 30분. 노량진 A은행 앞에서 댓글남 ㄱ씨를 만났다. ‘노량진에서 고시 생활을 한지 좀 되었다. 30대 초반이나 아재는 아니다. 밥 한 번 먹자’고 글을 남긴 사람이다. 댓글에는 밥 한 번 먹자더니, 정작 연락을 하니 ‘점심시간은 사람이 많으니 오전이나 오후 3시 정도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낯선 이와 카페에 마주 앉게 됐다.
<p >올해 서른둘이라는 ㄱ씨는 3년 째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다. 대학 재학 중 2년간 준비를 하다가 낙방하고, 1년가량 취업 준비를 하다가 그마저도 실패해 다시 공무원 준비를 시작했다고 한다. 노량진에 입성한 것은 지난해 1월. “마음먹고 공부에만 집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월세를 얻고, 독서실을 다니고 식사를 하는 한 달 비용은 100만원이 훌쩍 넘는데 모두 부모님의 지원을 받는 중이다.
<p >“저는 혼자 공부하는 스타일이에요. 노량진에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요. 지난달에 시험을 치르고 지금은 쉬는 기간이죠. 원래는 혼자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수험 기간이 길어지니 외롭더라고요. 이제는 같이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p >마음먹고 공부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올해 시험에서 떨어진 후 많이 꺾인 듯 했다.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공부도 할 사람이 필요해진 것이다.
<p >‘노량진에 연애를 하는 사람이 많냐’ 물으니 ㄱ씨가 다니는 독서실에도 커플이 많다고 답했다. “예전에는 연애하는 사람을 보면 ‘저래서는 합격 못한다’며 한심해했는데, 이제는 서로 의지할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은근히 연애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외로움에 KO당했다.
<p >
<p >△ 노량진 학원가
<p >
<p >오후 1시 30분. 두 번째 댓글남 ㄴ씨를 패스트푸드점에서 만났다. 각자 햄버거 세트를 하나씩 들고 앉았다. 서른셋이라고 나이를 밝힌 그는 현재 직장생활을 하는 중이라고 했다. 직장을 다니면서 휴무일에 노량진 독서실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 것이다.
<p >“밤샘 근무를 하고 바로 노량진으로 왔어요. 독서실을 끊고 이곳에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죠. 밥을 혼자 먹는 것이 처음에는 괜찮은데, 한 두 달 공부하는 게 아니잖아요. 혼자 말도 안하고 오래 있다 보면 정신적으로 멍해지기도 하고, 외롭더라고요. 이왕 밥을 같이 먹을 거라면 남자끼리 먹는 것보단 여자와 먹는 게 분위기도 좋죠.”
<p >ㄴ씨는 몇 년 전에도 노량진에서 공무원 준비를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스터디에서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그는 “보통 공시생이 연애를 하는 장은 스터디나 밥터디 등을 통해서”라고 전했다. “밥을 먹으려고 만나지만 마음이 맞으면 식사 후 같이 공부까지 하게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p >그는 “스터디에서 만나 연애를 하고 동거까지 하게 되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워낙 노량진의 월세가 비싸다보니 ‘돈을 아끼자’는 마음으로 연애를 하는 커플이 동거까지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p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량진 학원가 강사들도 공시족의 스터디 모임을 경계한다. 한 유명강사는 온라인 카페에서 ‘필기 노트 스터디를 구한다’는 수험생의 글에 “이곳을 섹스터디 모집 카페로 만들려 하냐”며 “스터디는 잘 이용하면 본전, 잘못하면 섹스터디가 된다는 노량진 선배들의 경고를 알고 있냐”고 지적했다.
<p >ㄴ씨는 헤어지기 전 “노량진에는 공부하는 사람 반, 공부 안 하는 사람 반”이라며 “처음부터 공부를 안 할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겠지만 무리를 만들고 연애에 빠지게 되면 의지가 약해진다”고 말했다.
<p >phn0905@hankyung.com
당사의 허락 없이 본 글과 사진의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