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4월2일 800명의 아르헨티나 군인들이 본토에서 약 600km 떨어진 말비나스(Malvinas;아르헨티나명) 제도에 상륙해 섬을 점령한다. 전 세계에 `포클랜드(Falklands) 전쟁`으로 알려진 아르헨티나와 영국 사이의 무력 출동을 이렇게 시작됐다.
아르헨티나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레오폴도 갈디에티 장군이 군사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을 겸하고 있었다. 갈디에티 대통령은 먼저 무력으로 말비나스를 점령하면 영국의 대처 내각은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노회한 제국을 맡은 대처는 가중되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해군을 비롯한 군비축소를 추진하고 있었다. 말비나스와 인근 남 조지아 섬을 방위하던 영국 군함도 철수했고, 남극으로 가는 교두보로서 말비나스의 전략적 중요성은 영국내에서도 잊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비나스는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가 19세기 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그 영유권을 인정 받으려 했으나 섬에 이민자들을 정착시킨 영국의 완강한 반대로 영국령에 속하게 됐다. 물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호시탐탐 말비나스의 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내부적으로도 군부의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과 실업률, 물가 상승으로 대표되는 경제난으로 가뜩이나 정통성이 없었던 군사정권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국내의 민심이반을 해결하고 국제적 상황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영국에 빼앗긴 고토(古土)를 되찾겠다는 명분론과 힘이 빠질대로 빠진 영국은 반격할 힘이 없다는 현실론이 더해진 것이다.
두 나라 전쟁의 결과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계산과 달리 본토에서 폭격기를 띄워 반격을 가하고 무려 100척으로 구성된 기동선단을 구성해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응징했다. 전쟁은 싱겁게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과 UN의 영국 지지, 아르헨티나에 대한 금수조치에서 볼 수 있듯이 냉정한 국제사회가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표면적으로 영국의 군사적 승리, 대처의 정치적 승리로 비쳤지만 양국 모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고 전비 15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아르헨티나는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었다. 빈사 사태였던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내몰렸고 군사정권은 이듬해 실각했다.
대처 영국 총리는 이 전쟁과 함께 무자비한 경제개혁을 통해 `철(鐵)의 여인`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갈디에티 대통령은 `철없는 군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올해는 말비나스 전쟁이 발발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영국은 윌리엄 왕자가 포클랜드 섬을 방문해 승전을 기념한 반면 페르난데즈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최남단 항구에서 희생자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대서양을 향해 눈물로 헌화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측에 말비나스에 대한 직항로 개설 등을 협상하자고 요청하고 있지만 영국은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최신예 함정을 파견해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승리하고 영국이 패전했다면 현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국민적 인기가 치솟으면서 수명을 더 연장했을 것이고, 무모한 전쟁으로 영토를 잃은 대처 내각은 국민적 비난과 함께 퇴진했을 것이다. 두 나라간 말비나스와 포클랜드를 둘러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나라가 다시 충돌한다면 30년 전과 완전히 다른 결과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시작된 한일간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한국은 자국 영토에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왜 남의 나라 섬에 한국 대통령이 방문을 했냐며 반발하고 있다. 일본은 오늘 내각 각료회의를 열어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보복조치를 논의한다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경기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한국은 연말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고, 일본 민주당 정권은 대중적 인기를 떨어지면서 국내 정치에서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의도 면적 보다 조금 더 큰 섬을 두고 갈디에티와 대처가 맞붙은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적 이유였다. 두 나라 정치권 모두 자국 국민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이용했다.
말비나스 전쟁은 독도 갈등과 놀랄 정도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독일과 달리 과거를 사과하고 청산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는 점을 빼면 독도 갈등이 말비나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영토라는 민감한 갈등이 두 나라 모두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양국의 국민과 그 후손들에게 되물림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비나스, 포클랜드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혜로운 대처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도 : 지식엔진연구소)
아르헨티나는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의 레오폴도 갈디에티 장군이 군사평의회 의장과 대통령을 겸하고 있었다. 갈디에티 대통령은 먼저 무력으로 말비나스를 점령하면 영국의 대처 내각은 협상테이블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노회한 제국을 맡은 대처는 가중되는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해군을 비롯한 군비축소를 추진하고 있었다. 말비나스와 인근 남 조지아 섬을 방위하던 영국 군함도 철수했고, 남극으로 가는 교두보로서 말비나스의 전략적 중요성은 영국내에서도 잊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비나스는 역사적으로 아르헨티나가 19세기 초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그 영유권을 인정 받으려 했으나 섬에 이민자들을 정착시킨 영국의 완강한 반대로 영국령에 속하게 됐다. 물론 아르헨티나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호시탐탐 말비나스의 회복을 노리고 있었다.
여기에 아르헨티나 내부적으로도 군부의 철권통치에 대한 반발과 실업률, 물가 상승으로 대표되는 경제난으로 가뜩이나 정통성이 없었던 군사정권은 돌파구가 필요했다. 국내의 민심이반을 해결하고 국제적 상황도 유리하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영국에 빼앗긴 고토(古土)를 되찾겠다는 명분론과 힘이 빠질대로 빠진 영국은 반격할 힘이 없다는 현실론이 더해진 것이다.
두 나라 전쟁의 결과는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은 아르헨티나의 계산과 달리 본토에서 폭격기를 띄워 반격을 가하고 무려 100척으로 구성된 기동선단을 구성해 아르헨티나의 침공을 응징했다. 전쟁은 싱겁게 영국의 승리로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미국과 UN의 영국 지지, 아르헨티나에 대한 금수조치에서 볼 수 있듯이 냉정한 국제사회가 힘의 논리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표면적으로 영국의 군사적 승리, 대처의 정치적 승리로 비쳤지만 양국 모두 커다란 피해를 입었다.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고 전비 15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아르헨티나는 사상자 630명과 항공기 94대, 함정 11척을 잃었다. 빈사 사태였던 경제는 파탄 직전까지 내몰렸고 군사정권은 이듬해 실각했다.
대처 영국 총리는 이 전쟁과 함께 무자비한 경제개혁을 통해 `철(鐵)의 여인`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갈디에티 대통령은 `철없는 군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올해는 말비나스 전쟁이 발발한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영국은 윌리엄 왕자가 포클랜드 섬을 방문해 승전을 기념한 반면 페르난데즈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최남단 항구에서 희생자에 대한 추모식을 갖고 대서양을 향해 눈물로 헌화할 수 밖에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영국측에 말비나스에 대한 직항로 개설 등을 협상하자고 요청하고 있지만 영국은 묵묵부답이다. 오히려 최신예 함정을 파견해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승리하고 영국이 패전했다면 현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국민적 인기가 치솟으면서 수명을 더 연장했을 것이고, 무모한 전쟁으로 영토를 잃은 대처 내각은 국민적 비난과 함께 퇴진했을 것이다. 두 나라간 말비나스와 포클랜드를 둘러싼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두 나라가 다시 충돌한다면 30년 전과 완전히 다른 결과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시작된 한일간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한국은 자국 영토에 대통령이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입장이고 일본은 왜 남의 나라 섬에 한국 대통령이 방문을 했냐며 반발하고 있다. 일본은 오늘 내각 각료회의를 열어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보복조치를 논의한다고 한다. 한국이나 일본 모두 경기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한국은 연말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고, 일본 민주당 정권은 대중적 인기를 떨어지면서 국내 정치에서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의도 면적 보다 조금 더 큰 섬을 두고 갈디에티와 대처가 맞붙은 근본적인 원인은 정치적 이유였다. 두 나라 정치권 모두 자국 국민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를 이용했다.
말비나스 전쟁은 독도 갈등과 놀랄 정도로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독일과 달리 과거를 사과하고 청산하지 않는 특수한 상황이라는 점과 물리적 충돌이 있었다는 점을 빼면 독도 갈등이 말비나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은 없다. 중요한 것은 영토라는 민감한 갈등이 두 나라 모두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되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피해는 고스란히 양국의 국민과 그 후손들에게 되물림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말비나스, 포클랜드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양국 정부와 국민들의 지혜로운 대처가 절실한 상황이다. (지도 : 지식엔진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