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KB사태와 경로의존성

최진욱 기자

입력 2014-09-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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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사태가 결국 파국을 맞았습니다. 온 국민이 지켜본 한 편의 비극이 막을 내리려 하고 있습니다.

탄생의 순간부터 현장을 지켜본 입장에서 씁슬한 마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IMF 외환위기 이후 현 KB국민은행은 2001년 옛 국민,주택은행이 통합해서 탄생했습니다.



초대 행장은 증권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고(故) 김정태 행장이 선임됐습니다. 관가 출신인 김상훈 이사회 의장(옛 국민은행장)과의 경쟁을 이겨내고 김 행장은 외환위기 이후 굳어진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슬로건을 은행(금융기관)에 처음 도입해 `스타 CEO`, `뉴스 메이커`라는 명성을 얻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김 행장은 국민카드와의 통합과정에서 회계기준을 위반했다며 금융감독원으로부터 `문책경고`를 받고 물러났습니다. 당국에 `미운털`이 박혔다는 소문이 파다하던 시절이었습니다.


(9월12일 임영록 회장 `직무정지 3개월` 확정)

KB CEO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9년에는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이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단행한 파생상품 투자 손실에 대해 당국이 `직무 정지`의 책임을 묻자 퇴진한 뒤 소송을 거쳐 명예를 회복했고, 강정원 전 행장은 해외진출의 일환으로 추진한 카자흐스탄 BCC은행 투자손실로 `문책경고`를 받았습니다.

어윤대 전 회장은 ISS보고서 사태로 `주의적 경고`를 받았고 민병덕 전 행장은 도쿄지점 비자금 조성으로 역시 `주의적 경고`가 내려졌습니다.

이달 2일에는 임영록 회장과 이건호 행장이 금감원으로부터 `문책경고`를 받았고, 급기야 금융위원회는 `직무정지 3개월`이라는 극약처방까지 내렸습니다. 13년간 KB를 거쳐간 CEO는 예외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경로의존성(經路依存性, Path Dependence)`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폴 데이비드,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주창한 개념으로 경제,정치,심리학 분야에서 다양하게 통용되고 있습니다. 한 번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나중에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그 경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성을 말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타자기의 키배열입니다. 기계식 타자기에서 영문자판을 사용하기 편하게 만든 키배열(쿼티,QWERTY)이 모바일 시대에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습니다.수동 타자기 시절에는 활자를 치는 기계의 팔이 뒤엉키지 않게 배열된 것이지만 전동 타입 시대에도 소비자가 익숙하다는 이유로 바꾸지 않는 것이 바로 경로의존성이라는 사회적 심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KB금융지주 사태도 전형적인 경로의존성에 의한 후유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4년 6월말 현재, 외국인 지분율 67%)

통합 국민은행 출범 당시에는 정부 지분이 있었지만(故 김정태 행장이 정부지분을 줄이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현재는 단 한 주도 없는 `민간기업`에 낙하산 CEO가 오는 것을 그동안 모든 이해관계자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CEO는 최소한 3년간 거대 금융기업의 수장이라는 빛나는 명예와 힘을 얻었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힘깨나 쓰는 사람들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인사를 CEO로 낙점하면서 `정치적 승리`의 전리품으로 여겼습니다.

금융지주와 계열사 내부에서는 낙하산 인사라는 비정상적인 절차를 정상적인 절차로 여기고 출세를 위해 `줄서기`에 나서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을 의식한 금융감독당국은 재직중인 실세 회장이나 은행장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습니다.

이 정도 되면 비효율도 말할 수 없는 비효율이지만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요원했습니다.



`직무정지 3개월`이라는 중징계를 받아든 임 회장은 스스로 `경로의존성`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결과는 한 개인이나 개별회사의 불행으로 그쳐서는 안됩니다.

낙하산 인사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보이지 않는 손` 뿐만 아니라 주주, 임직원, 감독당국도 후진적인 한국 금융산업의 현 주소를 바꿀수 있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벌써부터 3개월 동안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심입니다. 직무정지 기간동안 새 CEO를 선임할 것이라는 관측이 흘러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물경제를 지원하고 금융산업 스스로도 존재의 이유를 보여주기에 최근 경영환경은 녹록치 않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리잡았던 세계 경제의 밑그림 자체가 바뀌려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벌어진 KB사태를 계기로 한국 금융의 `경로의존성`은 반드시 사라져야 합니다.

비극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비극이 잉태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면 한국 금융산업의 미래 역시 비극을 피하기 힘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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