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의 어깨는 무겁다. 한 작품을 책임진다는 부담감은 어깨를 한껏 짓누른다. 연출은 자신만 돋보여서는 안 된다. 연출의 미덕은 전체를 살피고 조화롭게 이끌어 나갈 때 발현된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아우를 줄 아는 섬세한 안목이 필요하다. 그렇게 왕용범 연출은 이 바닥에서 15년을 버텼다. 자신만의 안목도 생겼다. 때로는 자신을 포기하고 팀원들과 호흡하며 발을 맞춰나갈 줄도 알게 됐다.
열정과 능력은 갖췄다. 완벽할 것 같은 그도 종종 현실의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그때마다 힘이 쭉쭉 빠진다. 공연계는 늘 ‘시간’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왕용범 연출은 “우리나라에서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은 고작 1년도 안 된다”라며 하소연했다. 그와 함께 연출할 때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가 무엇인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어떤 문제들로 그는 골머리 앓고 있는 것일까.
프리 프로덕션의 중요성, 이제는 인정할 때
‘프리 프로덕션’은 영화 촬영 전 프로덕션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서는 대본이 완성되어야 하고, 투자자를 만족시켜야 한다. 대본이 완성되면 본격적으로 촬영에 필요한 장소, 캐스팅, 의상, 특수효과 등이 확정된다. 세부적인 스케줄이 결정되면 세트가 만들어지고 스태프가 고용되며 주요 촬영 일정이 잡힌다. 이 시스템은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뮤지컬 등 공연 제작환경에도 적용할 수 있다. 현실은 어떨까. 공연계는 프리 프로덕션을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
“작품을 준비하는 기간이 짧아 힘들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사전 준비 기간이 길수록 좋다. 우리나라 제작 풍토는 프리 프로덕션을 인정해 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짧은 기간 안에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자기 배 곪는 이들이 많다.”
문제는 이해할 수 있어 더 골치 아프다. 한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하다. 큰돈을 들여 오랜 시간 작품을 준비하고 다듬어도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100% 성공하면 투자를 마다할 사람은 없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은 그 과정 역시 충분히 감내하고 인정한다. 그러한 풍토가 일찍이 정착됐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왕용범 연출은 이 부분에서 아직은 야박하다며 안타까워했다.
“가끔 공연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실수가 발생하곤 한다. 우리는 실수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경우 그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여력이 없다. 그런 부분이 연출을 하면서 가장 힘들다. 결국에는 이런 부분이 새로운 연출가의 출발을 가로 막는 결과로 이어진다. 제작 시간이 부족하니까 공연계는 경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실력보다는 경험이 중요한 잣대로 작용한다. 그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젊은 연출가 발굴, 프리 프로덕션이 해결책
프리 프로덕션은 젊은 연출가 양성의 문제로 삽시간에 번졌다. 젊은 연출가들은 무대 경험이 많지 않다. 그만큼 작품을 제작할 때 준비 기간이 더 길게 필요하다. 프리 프로덕션이 없는 상황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3개월은 그들이 실력을 검증 받기에는 굉장히 짧은 시간이다. 공연은 지휘권을 인정받기도 전에 무대에 올라 관객과 만난다. 실패는 예정된 길일 수밖에 없다.
“소극장, 중극장과 달리 대극장은 시스템부터 다르다. 뮤지컬과 영화가 다른 것처럼 대극장은 또 다른 세계다. 그만큼 이 시스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쉽지 않다. 아무리 재능 있는 연출이라 해도 대극장 시스템을 새로 배운 뒤에야 제대로 지휘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은 그들도 바쁘다 보니 대극장 시스템을 배울 시간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이다.”
젊은 연출가들은 대극장 문을 두드린다. 호기롭게 발을 들이고 한걸음 내딛는다. 그리고 예정된 실패로 쓴 맛을 맛본다.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은 없다. 잘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도전하고 노력한 시간만큼 그들의 연출력과, 지휘력, 안목은 옹골차게 여문다.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자산이다. 시간과 성장은 비례한다.
“결국에는 한 번 올라갔다 실패를 맛보고 이내 사라진다. 그것이 고민이다. 젊은 연출가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 풍토가 만들어져야 한다.”
소극장과 대극장의 시스템은 어떻게 다를까. 왕용범 연출은 “한 사람이 작품을 무대에 오를 수 있는 환경과 그렇지 않은 환경의 차이”라고 말했다. 그는 “소극장은 연출가의 독단으로도 충분히 작품을 만들 수 있다. 반면 대극장은 각 파트별 디자이너와 협력해야 한다. 전체적인 시스템을 모르면 지휘할 수 없다”라고 꼼꼼하게 비교했다. 대극장에서 시간이 ‘금’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연출은 작품을 책임지는 책임자이기에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하다. 안목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차곡차곡 쌓인 경험을 바탕으로 좋은 안목이 완성된다.
“소극장에서는 한 명이 열심히 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 저도 소극장에서 작품을 할 때 조명 디자인하고 설치하고 무대 제작까지 맡았다. 소극장 퀄리티 낮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소극장 시스템은 개인 예술에 가깝고 대극장은 컴퍼니 예술과 비슷하다. 파트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다.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작업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다는 뜻이다. 시스템 안에서 적응하고 배우는 것만큼 이 시스템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지휘를 잘 할 수 없다.”
시간은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담금질한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대극장 문이 상당히 높아졌다. 예전에는 소극장에서 시작해 중극장을 거쳐 대극장으로 넘어 오는 것이 자유로웠다. 왕용범은 “이제는 이러한 단계가 무너졌다. 아마 제가 마지막 세대였을 것이다”라며 달라진 시대에 맞춰 변해야 하는 자세를 강조했다. 조연출 생활의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 도드라졌다.
“조연출을 거치지 않고서는 연출 지휘봉을 잡기 힘든 시대다. 물론 아닌 경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벽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자존심을 버리라고 조언하고 싶다. 자존심을 버리고 이곳에 뿌리 내린 사람들과 잘 어울리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 전에 어떤 작품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