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에서 칭찬 많이 받습니다. 대통령께서 규제완화, 창조경제, 기술금융 등 본인이 지시한 정책들이 어떻게 추진되는 지 뉴스 검색을 자주하시는 데, 그럴 때 마다 금융위원회가 가장 많이 나온다고 좋아하십니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과 관련해 시장과의 소통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데,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자 돌아온 답변입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의 이 말 한 마디에 요즘 정부 정책이 왜 이렇게 엉망으로 꼬이고 있는 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수 많은 피해자를 양산했던 동양그룹 사기성 어음 발행 사건과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유출 사태 등 크고 작은 금융사고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2014년.
금융정책과 금융감독 업무를 총괄하는 금융위는 올 한해 동안 과연 무슨 일을 했을까.
지난 1년간 금융위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살펴보면 규제완화나 기술금융 등 대통령이 언급한 바 있는 정책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 쪽에선 물난리가 나서 난리 법석인데, 다른 쪽에선 불조심하라는 구호만 외치고 다닌 셈입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각종 금융사고에 대해 책임을 물으면 제도에는 문제가 없는 데 감독을 잘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변명하기에만 급급했습니다.
심지어는 보고를 제대로 못 받았다고 발뺌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손발이 하는 일을 머리가 모르겠습니까. 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문제가 생기면 언제나 손발만 잘라낼 생각을 하니까.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금융위를 상급기관으로 모시고 있는 금융감독원 직원들의 푸념입니다.
대통령이 원하는 정책을 폼 나게 추진하다 문제가 생기면 금감원 탓으로 돌리고, 자신들은 쏙 빠진다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과거 금융위는 저축은행 영업정지로 수 많은 저축은행 고객들이 피해를 입었을 때 금감원의 감독부실을 사태의 근본원인으로 지목하며 금감원에 책임을 돌렸습니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 같은 습관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지난해 발생한 동양그룹 사태 당시에도 금융위는 동양그룹의 부실 문제에 대한 보고를 받고 사태의 심각성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신속한 대책 마련을 미루다 문제가 생기자 책임 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KB금융그룹 내분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최수현 금감원장과 최종구 수석부원장, 조영제 부원장 등 금감원 수뇌부 3명이 옷을 벗었지만, 금융위는 지금까지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습니다.
KB 수뇌부에 대한 조속한 징계가 이뤄지지 않은 데는 금융위의 책임이 큽니다.
금융위는 모피아 출신인 임영록 전 KB 회장에 대해 중징계를 통보한 금감원의 결정이 과도하다며 ‘제 식구 감싸기’에 나섰고, 금융위의 이 같은 입장을 반영해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가 경징계로 제재수위를 낮춰주면서 문제가 시작됐기 때문입니다.
금융위는 우리은행 매각에 또 실패해 놓고도 국민들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수 조원에 이르는 공적자금 회수는 도대체 언제 하려는 지 여전히 오리무중입니다.
처음부터 실패할 가능성이 농후한 매각방식을 선택했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우리은행 인수를 희망하는 기업들에게 사실상 매각 의사가 없음을 공공연히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금융위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금융권 일각에선 금융위 내부에 ‘기술금융 등 정책금융을 선도적으로 수행할 시중은행 하나 정도는 정부가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매각의사를 접은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과 시장으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정책을 추진하기에 앞서 이해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추진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계속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여론의 비판이 정당하다면 정책을 수정하거나 더 나아가 아예 접어야 하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금융위의 행태를 보면 일방통행 일색입니다.
은행연합회장 인사에서 하영구 전 씨티은행장을 미리 낙점해 놓고 밀어붙인 일이 대표적입니다.
금융위는 하 전 행장을 KB 회장 후보로 밀다가 KB 이사회가 윤종규 회장을 KB의 차기 수장으로 선택하자 KB 사외이사 퇴진을 LIG손해보험 자회사 편입 승인의 전제 조건으로 내걸며 보복에 나섰습니다.
결국 이 같은 압박에 견디지 못한 KB금융과 국민은행 사외이사 들은 전원 자진 사퇴를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금융위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집행임원 두 명도 교체할 것을 주문하고 나섰습니다.
이들 두 임원은 국민은행 주전산기 교치과정에서 잘못된 행동을 해 금융당국으로부터 이미 경징계에 해당하는 제재를 받은 상태입니다.
이들 임원을 교체하든 말든 이제는 윤종규 회장이 결정할 일입니다.
아무리 정부가 인허가권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 기업에 대해 과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도한 경영간섭을 한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듭니다.
현 정부 임기 내에는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금융위 해체론’이 심심하면 고개를 드는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은 아닌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권 일각에선 금융정책과 금융감독을 총괄하는 금융위가 권한만 행사하려 하고 책임은 지지 않는 행태를 되풀이하면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금융위가 추진하고 있는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입니다.
아무 것도 책임지지 않는 금융위가 주도하는 소비자보호 정책이 국민들에게 진정성 있게 다가갈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금이라도 금융위가 국민과 시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책일질 때 책임질 줄 아는 정상적인 조직으로 거듭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