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소멸과 순환의 이야기"…연극 '3월의 눈'

입력 2015-03-24 18:11  



소멸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문(悲文)이다. 동시에 다시 돌아올 것을 믿는 희망의 찬가다. 연극 ‘3월의 눈’은 얼핏 느긋하게 내리는 눈송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물 한 방울 새지 않을 것처럼 촘촘하고 섬세한 결을 가진 작품이다. 관객들은 노부부의 일상을 바라봄과 동시에 그 삶이 담고 있는 ‘소멸’과 ‘순환’의 거대한 흐름과 마주하게 된다.

낡았지만 손 때 그대로 멋이 있는 한옥 한 채가 있다. 볕 좋은 3월, 대청마루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장오와 이순의 집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유일한 재산이자 쉼터인 이 집과 곧 작별을 해야 한다. 손주의 빚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집주인은 한옥을 허문 뒤 3층짜리 건물을 지으려 한다. 노부부의 일상은 그렇게 흐르고, 장오는 3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집을 떠난다.

장오와 이순, 노부부의 일상은 별다를 것이 없다. 장오는 오래된 이발소가 사라진 일을 말하고, 이순은 문풍지를 새로 바르자고 조른다. 서로 어긋난 기억을 투닥이며 맞추면서도 금세 너털웃음을 짓고 마는 노부부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삶의 조각들이다. 하지만 작품은 이 소박한 대화와 일상 속에 우리 사회와 근현대사의 거대한 줄기를 얽어내며 하고자 하는 말을 담담히 풀어낸다. 일상적 행위에 녹아있는 삶에 대한 통찰은 깊고 나직하게 관객의 가슴으로 파고든다.

장오와 낡은 한옥은 서로 닮아 있다. 한옥은 해체될 날을 기다리고 있고, 장오는 내일이면 집을 떠나 요양원으로 가야 한다. 이들은 발밑까지 다가온 ‘끝’을 함께 맞이해야 하는 동료인 셈이다. 소멸을 눈앞에 둔 새벽, 장오가 대청마루에 앉아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조는 장면은 마치 두 친구가 서로를 보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노곤한 장오의 고개가 툭툭 아래로 떨어질 때, 낡은 한옥은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없이 고요하고 적막한 그 순간은 “좋은 끝이란 없어”라는 장오의 대사와 겹쳐지며 삶의 덧없음을 곱씹게 한다.

작품은 소멸과 동시에 순환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장오는 집을 떠날 때 “다시 돌아오겠다”고 말한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는 법이다. 낡은 한옥도 지금은 헐리지만 다른 가구로 새로 태어나 어딘가에 쓰이게 될 것이다. 작품은 단순한 ‘끝’이 아닌, 언젠가 다시 시작될 순환의 과정에 대해서도 희망의 싹을 심어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황씨와 장오는 ‘상실’로 묶여 있는 인물들이다. 노숙자 황씨는 구제역으로 농장의 돼지들을 살처분한 뒤 정신을 놓았고, 장오의 아들은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든 후 돌아오지 않았다. 동시에 이들은 자본주의라는 가치에 의해 바깥으로 내몰린 사람들이기도 하다. 매년 봄 찾아오는 황씨에게 건네는 장오의 밥그릇과, 떠나는 장오에게 황씨가 따라주는 막걸리 한 사발에는 서로의 상실에 대한 위로가 담겨 있다. 황씨의 이야기는 장오가 겪고 있는 고통의 궤적과 함께 그어지며 작품의 진폭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해묵어 더 빛을 내는 무대 위 한옥은 그 자체로 연극 ‘3월의 눈’과 현 시대를 상징한다. 가치를 깨닫기보다, 증명하기 위해 사진기를 들고 모여든 젊은이들의 모습은 오래된 것의 가치를 창호지만큼 가볍게 여기는 우리의 현 세태를 성찰하게 한다. 수많은 구경꾼이 우글대는 속에서 홀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장오의 모습은 어딘가 베어낸 듯 허전하고 공허하다. 특히, 집을 떠나는 장오의 뒤편으로 한옥이 낱낱이 헤쳐지는 장면은 잔혹할 정도로 폭력적이다.

신구, 손숙 두 노배우의 노고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느릿한 걸음 속에 담겨 있는 삶의 흔적들이 작품의 무게를 더 육중하게 했다. 계산된 연기가 아닌 삶을 꼭꼭 눌러 담은 두 배우의 움직임은 이야기의 본질에 힘을 더욱 실어주었다.

연극 `3월의 눈`은 3월 29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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