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때문에 2012년 12월 아베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까지 국제금융시장에서 일본 경제를 보는 시각이 냉담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일본 경제가 ‘5대 함정’에 빠져 어떤 정책을 내놓다 하더라도 효과가 의문시 됐기 때문이다. 가장 우려됐던 것은 정부의 의도대로 경제주체들이 반응하지 않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정책함정(policy trap)`이다.
그 중에서 경기침체 탈피방안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금리인하 정책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져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일본처럼 정책과 유동성 함정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경제주체들이 과도한 부채에 시달려 소비나 투자를 하지 못하는 `빚의 함정(debt trap)`에 걸렸기 때문이다.
또 경제구조를 개혁하는 문제는 최종목표인 수익성과 경쟁력 개선여부와 관계없이 구호만 반복적으로 외치는 `구조조정 함정(structure trap)`에 빠졌다. 특정국 경제가 이런 상황에 놓이면 경제주체들이 미래에 대해 느끼는 불확실성은 증대돼 전망이 또 다른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지게 된다. 일본이 전형적인 국가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1990년대 버블 붕괴과정에서 20년 이상 지속된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했던 모든 정책이 무력화돼 죽은 시체와 같은 ‘좀비 경제(zombie economy)’라 불렸다. 1990년 이후 무려 20차례가 넘는 경기부양정책은 국가채무가 세계최고수준에 달할 정도로 재정수지만 악화됐다.
더욱이 일본 경제가 당면한 또 하나의 과제가 물가상승률이 마이너스 국면으로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이었다. 일본의 실질GDP 성장률은 1980년대 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내수부진에 주로 기인한 점을 감안하면 디플레이션 요인도 큰 것으로 지적됐다.
수출의 성장기여도는 1970년대 이후 0.5∼0.8%p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내수기여도는 70년대 3.8%p, 80년대 4.0%p에서 1991∼2008년에는 0.6%p로 급락했다. 이 때문에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에 89.6%에서 2008년에는 82.5%로 크게 떨어져 경기침체, 디플레 등 구조적인 문제를 발생시켰다.
내수 회복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경제가 당면한 현안을 해결하고 경기를 살리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경제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를 약세로 돌리는 길밖에 없다. 이때 태동했던 정책이 바로 ‘아베노믹스’, 발권력을 동원해 ‘안전통화 저주’에 걸린 엔화를 약세로 돌려 경기침체와 디플레이션 국면을 동반 탈출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아베노믹스를 현재 우리 경제팀의 경제정책인 ‘초이노믹스’와 비교해 보면 그 실체와 성공 가능성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지난해 세월호 사태로 ‘소프트 패치(경기회복 후 침체)’에 빠진 우리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에 빠질 것이라는 위기의식을 바탕으로 초이노믹스가 태동된 만큼 일단 아베노믹스와 비교하는 시각은 이해가 간다.
거시경제 목표도 성장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강도있는 정책수단을 동원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경제정책 효과가 그 나라 국민의 심리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이 점은 아주 중요하다. 추진한지 2년이 넘은 아베노믹스 효과에 대해 아직까지 의심이 나오는 것은 일본 국민들의 심리가 여전히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베노믹스와 초이노믹스는 경기 진단과 정책 성격부터 다르다. 초이노믹스는 우리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선제적이고 예방적인 정책처방의 성격이 강하다. 이에 반해 아베노믹스는 이미 ‘잃어버린 20년’에 빠져있는 일본 경제를 구출해 내기 위한 사후적이고 최후 보루의 정책처방이다.
정책여건과 동원된 정책수단도 차이가 난다. 초이노믹스는 국민소득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34%(IMF 기준)에 불과할 정도로 재정이 건전했다. 정책금리도 2.5%(현재 1.75%)로 얼마든지 내릴 여지가 있었다. 유동성 조절정책은 최소한 `함정(liquidity trap)`에 빠지지 않았다. 경제정책 신호에 대한 정책수용층의 반응도 일본처럼 좀비 국면에 빠진 것은 아니었다.
아베노믹스는 비정상 대책의 표본이다. 국민소득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세계 최고수준인 250%를 넘어 더 이상 재정정책을 동원할 수 없었다. 정책금리도 제로(0) 수준이다. 유동성 조절정책은 함정에서 빠진지 오래됐다. 거듭된 정책실수로 정책당국과 경제정책에 대한 정책 수용층의 반응은 좀비 국면에 빠져 좀처럼 헤어나지 못했다.
모든 것이 막혀 있을 때 동원하는 정책수단이 발권력에 의존하는 `충격요법(shock therapy)`이다. 전시에 돈을 찍어 인플레이션을 유발해 강제 저축으로 재원을 마련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아베노믹스는 발권력으로 엔저를 유도해 인접국의 경쟁력을 빼앗는 ‘근린궁핍화 정책(beggar-thy-neighbour policy)’이라는 점에서 최근처럼 글로벌 시대에서는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는 정책이다.
경기부양 중점대상도 다르다. 초이노믹스는 우리 경기대책 역사상 처음으로 기업의 투자가 아니라 가계의 소비를 늘려주는 방향으로 우선순위가 변경됐다. 단순히 소득이 아니라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가처분 소득을 늘려주는데 초점을 뒀다. 아베노믹스는 소비에 중점을 뒀던 종전의 경기대책이 먹히지 않자 기업의 수출을 늘리는 방향으로 되돌아왔다.
효과 면에서 이 점은 큰 차이가 난다. 총수요 항목별 소득기여도를 보면 우리는 민간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68%에 달한다. 일본은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불과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같은 경기부양의 화살을 쏘면 한국은 7점까지 맞춰도 되나, 일본은 반드시 10점 만점을 맞춰야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다.
국제사회에서 평가가 크게 다른 것도 이 때문이다. 초이노믹스는 과도기에 있는 한국 경제가 퀀텀 점프를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시각이 여전히 우세하다. 특히 해외에서 기대가 높다. 이에 대해 아베노믹스는 ‘잃어버린 30년’에 대한 우려가 여전히 남아있다.
더 주목되는 것은 일본이 아베노믹스 추진 이후 엔저를 묵인해 왔던 주변국과 일본 국민들의 태도가 변하고 있는 점이다. 중국 등 주변국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등 경제외적인 문제까지 겹치면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갈수록 확산되는 추세다. 올해 들어서는 아베 정부의 지나친 국수주의에 대한 우려가 일본 내에서도 고개를 들고 있다.
특히 아베노믹스 출범 이후 엔저를 묵시적으로 용인해 왔던 미국의 태도가 올해 들어서는 달러 강세에 대해 부담을 느끼면서 종전과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 점이다. 금리인상을 앞두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최대 현안이 될 경상수지적자를 줄이기 위해서는 엔화 강세 압력 등을 통해 추가적인 달러 강세 요인을 완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베노믹스가 당초 의도했던 경기회복과 디플레이션을 탈출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는 ‘역바세나르 협약(Anti-Wassenaar Arrangement)`을 통해 내수가 살아나야 가능하다. 역바세나르 협정이란 일본 수출기업이 엔저에 따란 반사이익을 임금인상, 배당증대 등을 통해 근로자에게 환원시키는 것을 말한다.
역바세나르 협약은 노사정 간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강력히 권고하는 아베 정부에 수출기업이 맞서고 있어 아베노믹스 앞날은 여전히 불안하다. 그런 만큼 지난 2년 동안 엔저에 시달렸던 국내기업들은 향후 추가 엔저보다는 원?엔 환율이 상하로 크게 움직이는 변동성이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그 어느 때보다 환위험 관리에 신경써야 한다.
<글. 한상춘 <a href=http://sise.wownet.co.kr/search/main/main.asp?mseq=419&searchStr=039340 target=_blank>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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