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편. 돈 많이 풀렸다…'화폐개혁'과 '현찰 폐지론' 불 붙는다.

입력 2015-10-05 14:35  

263편. 돈 많이 풀렸다…`화폐개혁`과 `현찰 폐지론` 불 붙는다
금융위기 이후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 이 때문에 개인의 화폐생활과 각국의 통화정책 여건이 급변하고 있다. 가장 큰 변화는 법화(法貨·legal tender) 시대에 돈에 대한 경시풍조다. 금융위기 이후 많은 과제, 즉 애프터 크라이시스를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이나 떨어진 통화가치를 과제가 최대 현안으로 떠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목적이 결부돼 있지만 각국 중앙은행은 `리디노미내이션(화폐거래단위 축소)`을 병행한 신권을 발행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발언을 계기로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불이 불었다. 일부 부자계층을 중심으로 ‘화폐개혁’으로 인식하고 있는 이 논쟁이 재연됨에 따라 가뜩이나 혼란한 우리 경제가 더 어수선해지고 있다.
비트코인, 라이트코인, 피어코인, 네임코인, 비비큐코인 등 이른바 ‘가상화폐’들이 규제강화에도 우후죽순처럼 태어나 빠르게 확산되는 추세다. 포인트. 마일리지, 쿠폰, 지역공동화폐 등 대안화폐가 상용화된지 오래됐다. 바야흐로 현찰(법화?legal tender)이 필요 없는 시대를 맞고 있는 셈이다.
특정국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 △거래편의 제고 △회계기장처리 간소화 △물가 기대심리 억제 △대외위상 제고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의 장점이 있다. 하지만 △화폐단위변경에 따른 불안 △부동산 투기 심화 △화폐주조와 신·구권 교환비용 증가 등 단점도 만만치 않다.
2000년 이후 각국은 신권을 발생했다. 미국은 20달러, 50달러, 100달러짜리 새롭게 도안했고, 일본은 20년 만에 10000엔, 5000엔, 1000엔짜리 신권을 발행했다. 국제금융시장에서는 획기적인 일로 평가된다. 신흥국들도 금융위기에 몰리고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인플레이션에 시달린 국가일수록 신권을 발행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신권을 발행해 목적을 달성한 국가들은 두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는 새로운 화폐를 발행해 기존의 화폐를 완전히 대체하되, 다른 하나는 화폐거래단위를 축소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병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 선진국들이 해당한다.
신흥국은 리디노미네이션을 결부시켜 신권을 발행했다. 이들 국가들은 부패와 위조지폐 방지, 대외위상 증가 등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고사하고 물가가 앙등하고 부동산 투기가 거세게 불면서 경제가 더 불안해 졌다. 터키, 모잠비크, 짐바브웨가 그랬고 2009년에 단행했던 북한도 실패했다.
여러 이유를 꼽을 수 있겠지만 법화 시대에 있어서 신권을 발행하는 것만큼 국민의 관심이 높은 것은 없다.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경우에는 더 그렇다. 특히 경제활동 비중이 놓은 부자와 대기업의 저항이 크다. 이 때문에 경제가 안정되고 국민들의 공감대가 형성돼야 신권발행과 리디노미네이션 단행의 목적을 거둘 수 있다.
선진국은 이 전제조건의 성숙 여부를 중시했지만 신흥국은 위조지폐가 발견되거나 부정부패가 심하고 최근처럼 대규모 자금이탈이 심한 긴박한 상황에서 그것도 급진적인 리디노미네이션까지 병행해 단행했다. 전제조건 충족 여부보다 상황논리에 밀려 논의되고 추진됐다는 의미다. 이 점이 결과의 차이다.
우리도 리디노미네이션 논의가 잊을 만하면 나오는 것은 경제규모가 커졌지만 1962년 화폐개혁 이후 액면단위는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기업회계에선 조(兆)원, 금융시장에선 경(京)원까지 심심찮게 나온다. 원화 거래단위도 달러화의 1000분의 1로 여겨지는 등 경제 위상과도 맞지 않다.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
최근처럼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미국 금리인상을 앞두고 금융불안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하거나, 논의하는 그 자체도 상당한 부작용이 예상된다. 국내 정세가 안정되고 국민의 공감대가 충분히 성숙될 때 논의되고 추진해야 한다. 한국은행의 해명이 따르긴 했지만 이주열 총재의 발언이 귓전에 계속 맴도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가상화폐(대안화폐도 포함)가 확산됨에 따라 통화정책의 유효성과 관련해 논란이 되는 대목은 크게 네 가지다. 무엇보다 본원통화의 대체문제다. 갈수록 본원통화의 상당부분을 가상화폐가 대체해 나갈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중앙은행 입장에서 보면 본원통화 축소에 따른 화폐발행차익(seigniorage)의 감소를 의미한다. 특히 화폐발행차익 감소는 통화정책 수행비용의 재정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중앙은행 독립성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둘째, 중앙은행의 금리조절 능력은 가상화폐를 누가 발행하느냐와 가상화폐가 어느 단계까지 발전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만약 중앙은행 이외의 다른 주체들이 가상화폐를 발행할 경우 현금보유 성향의 저하로 중앙은행의 금리조절 능력은 크게 약화된다. 또 가상화폐가 현금통화와 결제성 예금까지 대체할 수 있는 단계까지 발전할 경우 발행주체와 관계없이 중앙은행의 금리조절 능력은 심할 경우 무력화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셋째, 가상화폐의 발달로 통화승수와 통화유통속도가 커질 것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통화승수이론에 따르면 통화량은 본원통화와 통화승수에 의해 결정되고 통화승수는 현금보유비율과 지급준비율에 따라 좌우된다. 이 이론대로라면 가상화폐가 현금통화를 대체하면 통화승수는 커지게 된다.
넷째, 가상화폐의 발달은 여러 각도에서 통화정책의 전달경로(transmission mechanism?통화공급 조절→금리 변화→총수요 증감→성장률 혹은 물가 조절)에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서 가상화폐의 발달로 모든 금융거래에 있어서 위험 헤지가 수월해짐에 따라 경제주체들이 금리변화에 덜 민감해져 통화정책의 유효성이 떨어지는 점이 가장 우려된다.
가상화폐에 따른 본질적인 문제와 함께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중앙은행의 예측력을 강화하는 과제도 시급하다. 지금처럼 다른 전망기관보다 늦게 그것도 예측력이 월등히 높지 않고서는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를 확보하거나 선제적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일은 어렵기 때문이다. 예측모델 재설정, 시계열 일관성 유지, 정성적 평가 등에 고민도 있어야 한다.
특히 신뢰를 확보하는 과제는 통화정책 경로에서 금리와 총수요 간 민감도를 끌어 올리는 데도 중요하다. 가상화폐 확산 등으로 갈수록 불확실하고 길어지는 통화정책 경로에서 중앙은행 총재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말을 자주 바꾸거나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예측치를 언급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
통화정책 추진 과정에서 흐트러진 정책수단과 중간조작, 최종목표 간 인과관계도 재정립해야 한다. 이를테면 중앙은행 입장에서 성장과 물가 간 우선목표를 정하고 이를 위해 금리조작이냐 통화량 변경이냐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추세적으로 물가가 안정된 시대에서는 중앙은행 목표, 통화정책 관할범위, 적정금리 산출방식, 감독범위 등도 재설정해야 한다.
가상화폐 확산에 따른 새로운 환경에 맞게 새로운 통화지표를 개발해 통화유통속도, 통화승수 등을 정확히 추정해야 한다. 갈수록 가속력이 붙을 가상화폐 발행에 대한 규제와 위조지폐 방지 등을 통해 ‘폐지 혹은 무용론’까지 불고 있는 현찰(법화)의 위상도 강화해야 할 때다. 각종 가중치와 산출방식 현실화를 골자로 한 통계개편 작업도 서두를 필요가 있다.


<글. 한상춘 <a href=http://sise.wownet.co.kr/search/main/main.asp?mseq=419&searchStr=039340 target=_blank>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객원논설위원(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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