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애 기자] ‘산타’와 ‘로맨틱’. 마냥 예쁘기만 한 이 단어들은 그의 이름 앞에만 가면 조롱 섞인 유머가 돼버린다. 언제부터인가 작품 대신 스캔들로 더 많이 언급된 배우, 이병헌이다. 최근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50억 협박사건’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극히 사적인 부분까지 공개되며 이미지에 쉽게 지우기 어려운 흠집이 났다. 이후 할리우드 영화 ‘터미네이터:제네시스’와 ‘협녀:칼의 기억’로 조심스레 대중에 노크했지만 닫힌 문은 좀처럼 열기 어려웠다. 몰아치듯 겪은 흥행 실패와 각종 구설수로 가득했던 시간을 겨우 지나 그가 다시 대중 앞에 섰다. ‘사건’ 이후 2년만의 첫 공식 인터뷰다.
5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병헌은 생각보다 차분한 모습이었다. 인터뷰에 앞서 기자에게 농담을 건네는 눈빛에서 어쩐지 그가 느꼈을 부담감과 조심스러움이 느껴졌다. 19일 개봉을 앞둔 영화 ‘내부자들’에서 이병헌은 대기업 회장과 정치인에게 이용당하다 버려져 복수를 계획하는 깡패 안상구 역을 맡았다. 기자는 이병헌에게 안상구가 ‘딱 맞는 옷’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의외의 답변을 내놨다. 그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안상구 캐릭터가 제일 별로였어요”라며 “제일 매력적으로 보인 건 백윤식 선배님이 연기하신 이강희 캐릭터였죠. 누가 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역할이라 배우로서 탐이 났어요. 그래서 다소 무미건조했던 원작 속 안상구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서 굉장히 다양한 설정에 도전했죠”라고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이번 영화에서 역대급 망가짐을 불사했다. 의미없는 변신은 아니었다. 머리카락 한 올까지 치밀하게 설계된 망가짐은 그의 캐릭터에 한층 강력한 힘을 실었다. 그는 “3시간 40분짜리였던 편집본을 2시간 10분으로 줄였거든요. 많은 부분이 편집된 만큼 관객들에게 인물의 행동을 이해시키기 위해 캐릭터를 입체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했죠. 원작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안상구 캐릭터는 무식한 복수를 꿈꾸는 조폭이에요. 굉장히 드라이한 인물이죠. 근데 인간적으로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제 나름대로 상상하면서 패션, 습관, 말투에 색을 덧입힌거에요" 라고 밝혔다.
이병헌의 인생캐릭터라고 부를 만한 안상구는 그렇게 탄생했다. 스테레오 타입의 조폭캐릭터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안상구의 헤어스타일부터 신발 한 짝까지 일일이 관여했다. 그는 “원작 속의 안상구는 늠름한 풍채에 꽉 끼는 수트를 입은 전형적인 `조폭형님` 스타일이에요. 하지만 제가 만든 안상구 캐릭터는 연예기획사 대표 출신인 만큼 남다른 패션 감각을 가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무채색의 셔츠 대신 화려한 무늬의 블루종이나 녹색 수트처럼 과감한 패션을 즐겨 입는 사람으로 설정했죠. 평소에 셔츠 한 장을 입더라도 독특한 스타일을 선호하는 사람인데 어느날 갑자기 삶이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해서 옷을 대충 입을 것 같진 않았어요. 그래서 `패션 양아치`라는 별명이 생겼나봐요"라며 웃어 보였다.
이어 안상구를 허당끼 다분한 깡패로 표현한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어두운 현실을 담은 영화지만 무겁게만 가는 건 싫었어요. 빈틈 많은 안상구의 모습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숨 쉴 여유를 주고 싶었고요. 사실 영화 내내 좋은 사람은 거의 안 나오잖아요. 안상구도 완벽히 선한 인물은 아니지만 그나마 덜 나빠 보이는 건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덜 떨어진 매력 때문일거에요. `그래도 안상구에겐 이런 인간미가 있다`라는 걸 부각시키려고 애초에 시나리오에 없던 유머 코드를 넣느라 애드리브가 엄청나게 많아졌죠”라고 밝혔다.
실제로 이병헌은 이번 영화에서 조승우와 수많은 애드리브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라며 “사실 처음에 조승우의 캐스팅 소식을 듣고 호흡이 안 맞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잠깐 했지만 정말 합이 잘 맞았어요. 극 중 제가 애드리브로 욕을 하면 `상구야 잘 들어` 대신 `깡패야 잘 들어`라고 맞받아치기도 하고, 정말 그냥 조승우 씨랑 놀듯이 촬영했어요. 영화 ‘협녀’때는 굉장히 깊은 감정이었기 때문에 늘 심각했다면 이번엔 굉장히 릴랙스한 상태였거든요. 모든 연기가 훨씬 자연스러웠죠”라고 덧붙였다.
특히 그는 이번 영화 속 남달랐던 액션씬을 언급하기도 했다. 극 중 클라이맥스인 백윤식과의 액션씬에 대해 “모양새나 폼이 멋있게 나오는 것보다 그 액션을 하고 있는 안상구의 감정을 보여주는 것에 포커스를 둔 점이 특별했어요. 멋들어진 액션에 초점을 맞춘 영화가 아니잖아요. 근데 이런 개싸움같은 액션이 훨씬 힘들어요. 자연스러워야 하니까요. 그래서 극 중 우장훈 검사에게 ‘우리 사이는 거시기해’라고 말할 정도로 믿은 사람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을 어떻게 액션으로 표현할까, 오로지 그것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사실 스크린 속 이병헌의 액션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는 이미 수많은 느와르와 범죄물을 통해 남성적이고 강한 캐릭터를 맡아왔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그는 “특정 장르를 선호하거나 거부하진 않아요. 다만 현실에서 요구하는 것에 따라갈 뿐이죠. 장르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관객들이 많아진다면 더 많은 시나리오를 받아볼 수 있겠지만 최근엔 액션이나 사회고발성 시나리오가 많아진 건 사실이에요”라고 전했다. 더불어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사회비판적인 영화가 어느 순간부터 엄청 유행하더라고요. 좋은 건 아니죠. 이건 그만큼 현실도 그렇단 뜻이니까요”라며 “그렇다고 시나리오를 고를 때 ‘아 이런 부정사회를 내가 고발하겠다!’ 이런 거창한 뜻을 가지고 선택하진 않아요. 여전히 제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 1순위는 ‘재미’에요. 메시지는 그 다음이죠”라고 덧붙였다.
영화 이야기로 한창 들떠있는 그에게 다소 불편할 수 있지만 꼭 묻고 싶은 질문을 해야 했다. 의외로 이병헌은 피해가지 않았다. 영화 ‘내부자들’은 지난해 소송으로 시끌했던 당시 촬영한 작품. 그는 “오히려 그래서 더욱 작품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라고 운을 뗐다. 사건 이후 대중들의 시선과 작품에 끼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에는 굳어진 표정으로 한참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대중의 시선...어떻게 모를 수 있겠어요. 몇 번의 사과로 끝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일단 제가 바라는 건 순수하게 영화 자체만 보고 판단해주시는 분들이 계시길 원하는 거죠”라며 “어쨌든 영화는 혼자 찍는 게 아니니까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만든 결과물인 만큼 제 개인적인 일로 피해보는 사람이 최대한 없길 바랄 뿐입니다”라는 신중한 답변을 내놨다.
이병헌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은 다양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최근의 그는 작품보다 9시 뉴스에 더 자주 얼굴을 비춘 트러블 메이커 아닌가. 하지만 그저 그런 가십의 대상으로만 비춰지며 그가 가진 배우로서의 힘까지 싸잡아 저평가되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다. 물론 대중의 판단을 강요할 수는 없다. 나아가 연기력이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병헌의 사생활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만큼 그의 연기력 역시 제대로 평가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주)쇼박스)
eun@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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