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내용이 일부 소개됩니다.
미국에 진출한 이병헌의 성과는 아시안 할리우드 스타의 흥행성은 그대로 이식한 채, `대화가 없이 액션만 보여주는` 한계를 부쉈다는 점이다. 영화 `G.I. Joe`에서 그는 무술하는 동양 남자인 동시에, 충분한 감정 표현과 대사를 따냈다. 또한 액션 영화의 버디 멤버로 소비되지 않고 캐릭터의 고유한 설정을 지켜냈다. 그리고 2016년 개봉하는 `황야의 7인`, `비욘드 디시트` 에서는 알 파치노, 덴젤 워싱턴, 안소니 홉킨스 등 전설적인 배우들과 함께 연기한다.
반면 한국에서 그의 입지는 각종 소송과 추문으로 얼룩진 최악의 한 해였다. 더불어 최근작인 영화 `협녀`의 흥행 실패로 데뷔 이후 단 한 번도 제기된 적 없는 `이병헌 위기설`이 고개를 들었다. 이 최악의 시점에서 영화 `내부자들`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금의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종로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이병헌을 만났다.
영화 잘 봤다. 시사회부터 반응이 뜨거웠다. 기분이 어떤가?
인터넷 댓글은 잘 확인하지 않는다. 기자간담회 반응이 좋았다는 얘기만 들었고, 그 기념으로 감독님과 맥주 한잔 한 게 전부다. 정말 안도했다.
`내부자들`의 주인공 깡패 안상구 역할을 맡았다. 폭력과 유머러스가 공존하는 매력적인 캐릭터더라. 배역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나?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근데 처음 시나리오에서는 안상구 캐릭터가 주인공 셋 중에 제일 별로였다. 그래서 변주를 주기 위해 애드립이나 유머러스한 상황들을 적극적으로 제안했다.
조승우가 깡패를 하고, 이병헌이 검사를 해도 흥미로웠을 거 같다.
정작 나는 논설주간 이강희 역이 제일 탐났다. 물론 백윤식 선생님의 이강희는 굉장했지만, 이강희 같은 인물은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색깔이 달라지기 때문에 참 귀한 캐릭터다.
극중 스카잔(화려한 자수를 새긴 일본식 블루종) 입은 모습이 화제다. 리젠트 컷에 스카잔까지. 이병헌이 일본 양아치 차림이라니! 멋있었다.
원본 영화 길이가 세 시간 반이다. 개봉된 최종 편집본은 두 시간 이십 분이니 잘려나간 게 많다. 영화에 나오지 않지만 안상구는 영화광에 패션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인생이 나락에 떨어진 상황에서도 멋은 놓치지 않는 거다. 그런 옷을 스카잔이라고 하나? 의상팀에서 준비한 건데, 나도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다. 이태원에서나 볼 수 있는 패션 아닌가.
그렇군. 시나리오의 캐릭터에서 이병헌 스스로 많은 변주를 가한 건데, 그런 개입에 감독이 싫어하지 않았나? 흔히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라고 하니까.
원래 감독에게 왈가왈부 잘 안 하는 성격이다.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상의한다. 시나리오의 안상구는 복수귀일 뿐이고, 이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가 잘 느껴지지 않더라.
왜? 복수귀면 안되나? 극 중에서 팔이 잘렸는데, 그런 인간에게서 유머가 나오는 게 기적이지.
정확히는 입체적이지 않다는 거다. 내내 심각하고 빡빡하기만 하고, 배우로서 욕심이 나지 않는다고 할까? 심지어 시나리오상에서는 팔에다 다리까지 잘린다. 그래서 의수에 목발까지 짚고 다닌다. 그런 몸뚱이로는 액션조차 불가능할 테니 둘 중 하나만 자르자고 감독에게 제안했다.
그래서 복수 속에 액션과 유머러스함이 공존하는 캐릭터로 거듭났군. 팔만 자른 게 다행이다. 자르는 장면이 너무 실감 나서 눈뜨고 보기가 힘들었거든.
배우에게 호러 영화 찍을 때 무섭지 않으냐고 많이들 물어보는데, 의외로 현장은 재미있다. 잔인한 장면을 찍는다 해서 그 감정이 계속 유지되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부자들`에서 팔 자르는 신은, 연기하는 내가 막 소름이 돋더라. 가짜 팔이지만 내 팔이 실톱으로 쓸리는 걸 보자니...
당신 팔 자른 그 사람, 오 회장 해결사 역 조우진의 섬뜩한 연기가 실감에 한 몫 했다.
맞다. 심지어 원본에는 그 친구가 잘린 내 팔을 갖고 나가기까지 한다! 내가 다시 주워다 붙일 수도 있으니까. 너무 연기를 살벌하게 잘해서 ‘저 친구 누구지? 어떻게 저런 설정을 해 왔을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신이 끝나자마자 싹싹하게 “선배님 괜찮으세요?”라고 물어오는데, 그래서 더 헷갈리고 무서웠다(웃음). 충무로에 또 한 명의 굉장한 배우가 등장했다고 생각한다.
백윤식, 조승우, 이병헌 세 사람의 연기력 대결이 영화 홍보의 주요 포인트였다. 편집의 비중에 대해서는 불만 없나? ‘왜 내 것만 많이 잘랐어!’ 같은 마음. 대배우들은 그런 것에 연연치 않나?
연연한다. 말을 안 할 뿐이지. 셋 다 서로가 아깝다고 생각할 거다. 근데 아마도 내게 가장 많이 잘렸을 거다!
다른 둘도 똑같이 생각할 거 같은데?
아니다. 안상구는 직접적인 사건과 관련 없는 세세한 설정이 많다. 그런 게 전부 잘려나갔단 말이다!
그것 역시 다른 둘도 똑같이 생각할... 죄송합니다. 다른 질문 하겠다. 조승우와의 연기 호흡은 어땠나?
배우 조승우와 나의 호흡이나 시너지 등 예측하기가 힘들더라. 그런데 첫날 촬영하자마자 참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애드립을 던지는 족족 순발력 넘치게 받아치더라. 또 조승우 쪽에서 “어이 깡패”하고 들어오면 내가 거기에 맞춰서 애드립을 날리고.
좋은 케미였군. `이병헌과 연기하면 무조건 뜬다`는 공식이 있다. 물론 조승우나 백윤식은 진작에도 굉장한 배우지만, 한효주와 류승룡은 `광해` 이후 충무로의 중심이 됐다고 생각한다.
기분 좋다. 같이 연기한 사람들이 좋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데, 얼마나 뿌듯하나. 그런 작품 중 최고는 드라마 `해피투게더`라고 생각한다. 김하늘, 조재현, 송승헌, 차태현, 전지현 등 지금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캐스팅 아닌가.
그럼 할리우드에 뻗어 나가게 끌어주기도 하나?
할리우드에서 내게 아시안 배우를 찾는다고 문의하는 경우는 있다. 그럴 때마다 잘 됐으면 하는 바람에 영어가 가능한 한국 배우를 물색해 소개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개 중국 배우들이 캐스팅된다. 아무래도 티켓 파워가 차원이 다르니까. 그때마다 자존심 상한다. 중국의 힘을 이런 식으로도 느끼나 싶어서.
아직 이병헌이 끌어줘서 잘 된 케이스는 없나 보군.
나조차도 매번 캐스팅이 아슬아슬하다. 한 영화는 이미 나로 캐스팅이 완료됐는데, 일주일 뒤에 중국 사람으로 캐스팅이 교체됐다는 거다! 한참 좋다 말았다. 그러다 그쪽 영화사랑 다시 미팅할 일이 있었는데, 마침 할리우드에서 `달콤한 인생` 리메이크 얘기가 돌던 시점이었다. 그래서 `달콤한 인생` 봤느냐고 넌지시 물었는데, 그쪽에서 “농담하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영화다.”라고 말하더라. 그러고 보니 눈앞에 있는 내가 바로 그 영화 주인공이잖아? 그렇게 가까스로 캐스팅된 적도 있다.
역시 `달콤한 인생`이 이병헌 연기 인생의 중요한 이정표인 것 같다. 그 이후로 대부분 액션 연기가 가미된 배역만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이병헌이 멜로 연기에서 보여주는 깊은 눈빛을 좋아했는데 아쉽다. `그해 여름`, `번지점프를 하다` 같은 멜로는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딱히 액션이란 장르를 선호해서는 아니다. 그저 배우가 직업인 사람으로, 현실의 요구에 따라가는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 액션이나, 사회성이 짙은 영화들이 흥행하지 않나? 그만큼 내게도 그런 류의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오는 거다. 좋은 멜로물 시나리오는 잘 보기 힘들다. 당장 `내부자들`도 사회성 짙은 내용이고.
이병헌이 사회성 짙은 영화를 하는 건 처음이다. 의도하는 바가 있었나?
사회고발, 정의 등 영화 너머의 거창한 취지는 없었다. 그저 재미있어서 선택했을 뿐이다. 내가 작품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고. 관객 분들이 영화에서 씁쓸한 현실을 느끼겠지만, 재밌게 봐주었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성 짙은 영화들이 흥행하는 건 지금 우리 사회가 그 부분에 결핍이 많아서라고 생각하기에 안타까운 마음도 있다.
최근 소송과 각종 사건으로 비난 여론을 면치 못했었다. 이번 영화가 재기의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나?
그보다는 혼자 찍은 영화가 아니지 않나. 나 때문에 함께 영화를 제작한 모든 분이 영향받지만 않길 바란다. 그저 영화를 영화로만 봐 주시는 관객분이 계신다면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