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 변형된 성과주의 꼼수‥'후선역' 부활

김정필 부장

입력 2016-04-08 14:33   수정 2016-04-08 15:37

    <앵커>
    혹시 ‘후선역’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말 그대로 창구 일선이 아닌 뒷 선에 배치돼 역할을 맡는다는 뜻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은밀히 성행했던 은행권 퇴출 프로그램인 ‘후선역’이 당국의 성과주의와 맞물리며 변형된 형태로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김정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기자>
    4월의 첫 날. 지점에서 수 십년 째 묵묵히 근무해 온 베이비부머 세대이자 지긋한 나이의 한 직원은 퇴근 길 인사부로부터 한 통의 문자와 메일 형태의 안내문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십니까 따스한 햇살이 반겨주는”으로 시작하는 마치 봄 날씨와도 같은 온화한 문구의 안내문이었지만 내용은 따뜻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은행 역량평가 심의위를 거쳐 ‘동기부여 프로그램’ 대상자로 선정됐다는 이 통지는, 저성과자 갱생 프로그램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는 사실상 퇴출을 의미하는, 최후의 통첩이었습니다.

    국민은행 측은 ‘저성과자 추리기’, ‘퇴출과는 거리가 멀다’며 대상자로 선정된 이들에게 영업, 마케팅, 근무태도 등 부족한 부분을 재교육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행 등 금융권에서는 구제책이라기 보다는 퇴출책에 더 근접한 ‘후선역’으로, 최근 일련의 성과주의와 맞물리며 이름만 바뀐 채 부활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측에서는 이들이 교육을 잘 받거나 성과 달성시 복귀가 가능하다며 ‘동기부여’라는 이름을 붙여 시행중이지만 구제된 사례에 대해서는 답변을 내놓지 못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상대평가를 하면 성과가 낮은 이가 나오기 마련이지만 ‘무임승차’ ‘개혁 대상’으로 낙인찍어 퇴출으로 몰아가는 오래된 ‘악습’과 같은 시스템이 고개를 들고 있는 셈입니다.

    성과가 상대적으로 낮고 제 때 승진을 못 했어도 수 십년간 일한 맏형 격 구성원이 하루아침에 무보직으로 감당키 힘든 곳에 배치하고, 주변의 시선 등 인간적 모멸감이 몸과 마음을 더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국민은행 동기부여 프로그램 대상자
    “아차 싶었다. 왜 그랬나 싶고. 소명서 제출하고 (무보직) 대기상태인 데 창피하고 부끄럽고..퇴출로 가겠죠. 퇴직금 지급 않고 ‘쉬운 해고’..일방적으로 제거할 수 있는 ‘쉬운 해고로”

    이 같은 저성과자, 고연령, 고호봉 직원에 대한 특별 관리프로그램, 속칭 ‘후선역’을 다른 명칭으로 부활시켜 적용하는 은행은 비단 국민은행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해 3월부터 고연령·고호봉 임에도 승진에서 누락된 이들을 별도로 관리하는, ‘특별 우대제도’라는 이름으 사실상 ‘후선역’을 양지로 끌어 내 시행중입니다.

    농협은행도 저성과자를 각 본부에서 별도 관리중이고 일부 국책은행, 시중은행 역시 ‘후선역’ 등을 포함한 변형된 성과주의 도입을 검토하는 등 퇴출 시스템 부활이 `확대일로(擴大一路)` 양상입니다.

    사측은 노조의 암묵적 합의·묵인하에 ‘후선역’. 변형된 성과주의를 활용 중으로 은행권 1인당 생산성이 높기로 유명한 신한은행도 10년째 ‘후선역’을 드러나지 않게 활용해 왔습니다.

    <인터뷰> 신한은행 관계자
    “일단 10년 전부터 해왔고. 이름은 ‘후선역’ 제도. 문제는 ‘주홍글씨’ 씌워지니 공식적으로 빼내어 발령은 못내는 데 ‘후선역’ 인원·규모 이런 것 말 못하고 있다. 인사 때 티 안나게 하고”

    고호봉·고연령자, 저성과자, 낙인 찍힌 일부 베이비부머 세대들은 어려운 시기, 성과와 관련된 구호가 높아지면 늘상 `비용 감축`, ‘정리’ ‘퇴출’의 1순위로 꼽히곤 합니다.

    <인터뷰> 은행권 ‘후선역’ 대상자
    “저는 남은 기간에 명예롭게 희망퇴직 하고 싶습니다. 저에 대한 평가는 주위에 있는 분들에게 물어보면 압니다. 정말 며칠간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우울합니다”

    금융 노조와의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변형된 성과주의 격인 ‘후선역’이 슬그머니 자리를 차지해 나가고 있는 가운데 고령의 고호봉 저성과자들은 추스릴 경황조차 없이 조직 밖으로 쓸쓸히 내몰리고 있습니다.
    한국경제TV 김정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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