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000,000,000,000원, 그러니까 52조원입니다. 52란 숫자 뒤에 0이 12개 붙었습니다.
대통령의 이란 순방 이후 우리나라가 거둔 경제적 성과로 청와대가 내세우는 금액입니다.
공교롭게 이웃나라 일본의 한 해 군사예산에 맞먹을 만큼 큰 규모인데, 이 숫자의 실체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무역협회, 전국경제인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중견기업중앙회 등 국내 경제 5단체가 모여 개최한 `경제외교 성과 확산을 위한 토론회` 이후 이어진 브리핑에서도 이 숫자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잘 알려진 대로 이 52조원은 확정 금액이 아니고, 우리 기업들이 이란 현지기업과 맺은 MOU가 모두 이뤄질 것이라고 가정한 최대 금액입니다.
일단 371억달러의 성과가 났다고 밝힌 건설 프로젝트 30개를 살펴보면 양해각서(MOU)가 13건으로 가장 많고,
합의각서(MOA)가 4건, 주요 계약조건 협상 중인 건이 3건, 업무협력 최고합의각서(HOA) 3건, 가계약이 2건, 기타가 4건입니다.
이 가운데 MOU와 MOA는 법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참고로 이명박 대통령 시절 자원외교를 내세우며 전세계와 체결한 양해각서 96건 가운데 본계약으로 이어진 사례는 16건.
그러니까 6건 가운데 5건은 본계약이 불발됐던 셈입니다.
당시 유가하락 등 변수가 많았던 자원외교와 이번 이란 건설 프로젝트 MOU의 본계약 도달률이 똑같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MOU를 맺었다고 해서 본계약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은 업계의 상식입니다.
실제 11일 개최된 브리핑에서도 이동근 대한상의 상근부회장은 "경제외교 성과는 최대한으로 볼때 그 정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로, 몇년 후에 그 금액을 수주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성과`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을 이루어 낸 결실이나 결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본계약 체결 전에는 `성과`라는 말을 쓰는 것을 더 조심스러워 했어야 합니다.
취재를 해보면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이 체결한 MOU와 프로젝트 규모를 밝히는 데 대해 오히려 기업들이 부담스러워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란에서의 사업이 금액규모에만 집착해서 내세울 일이 아니라는 거죠.
정부가 경제 외교 성과로 내세워야 할 것은 금액이 아니라 그 금액을 기업들이 실제로 따 내기 위해 어떠한 시스템을 만들어줬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를테면 결제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란과의 거래에서는 아직도 달러화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이란과 거래를 할 때 이란으로부터 원유를 수입하고, 그만큼의 기름값을 원화로 쳐서 국내 우리은행과 IBK은행 계좌에 넣어둡니다.
만약에 반대로 한국 기업이 이란에 물건을 팔아서 돈을 받아야 하면,
이란은 우리은행과 IBK 계좌에 기름값으로 받아뒀던 원화를 빼내서 우리 기업에 대금을 지불하는 방식으로 교역해오고 있습니다.
불편할 뿐 아니라, 원유 수입보다 국내 기업의 이란 수출이 활발해지면 돈 받기가 어려워지는 구조라는 게 문제입니다.
현재 이 계좌에 있는 금액은 몇 조원대로 추정되는데 이란에서 건설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운용하는 기업이 아닌 소규모 기업들은 벌써부터 대금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란 교역이 늘어나면서 겪는 보이지 않는 어려움입니다.
아직까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뚜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수출업에 종사하는 관계자는 "해당 애로 사항을 정부에 건의했지만 뚜렷한 답을 받지는 못한 상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기회의 땅 중동`을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기회가 없어도 만들어야 하는게 지금 우리 경제 상황입니다.
새로운 지역에서 수출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자랑이 아니라 철저한 시스템이고 정책 방향성이라는 지적에 정부가 귀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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