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DP 규모 74분의 1인 아이슬란드에도 뒤져
세계기업가정신 발전기구(GEDI)가 발표한 `2017 글로벌 기업가정신 지수 보고서`는 충격적입니다. 한국은 세계 137개국중 27위에 올라있습니다. 숫자로 겉만 보면 나쁜 것 같지 않지만, 자세히 따져보면 상황은 심각합니다. 칠레, 에스토니아, 대만보다 낮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만 따져도 23위로 중하위권입니다. 우리나라보다 상위에 자리한 국가 중 지난해 GDP(IMF 발표기준)가 더 많은 나라는 미국, 일본, 영국 등 5개 나라에 불과합니다. 한국의 GDP는 1조4044억달러(11위)를 기록했지만, 기업가정신에서는 GDP 109위 국가인 아이슬란드보다도 뒤쳐집니다. 경제규모는 커졌지만 기업가정신은 초라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기업가 정신이야말로 한국의 놀라운 경제성장을 상징하는 단어였다는 점입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커는 지난 1996년 한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기업가정신이 활성화된 국가로 꼽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세계 경제 전문가들은 한국의 기업가정신이 실종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특히 최근 기업가정신 부활을 외치며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고 있는 반면, 한국은 기업가정신 위축으로 또 다른 `한국판 잃어버린 20년`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GEDI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 한국의 기업가정신은 굴러갈 수 없는 망가진 바퀴
소니를 제친 삼성전자, 도요타를 넘보는 현대자동차, 세계 1위 타이틀을 거머쥔 조선산업 등 민간 기업들의 활기찬 활동으로 2000년대 중반까지 한국의 기업가지수는 일본을 앞섰다는 평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최근 3년 동안 기업가지수가 크게 개선되며, 끝내 올해 한국을 추월했습니다. 한국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신흥강국 중국 역시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며 뒤쫓고 있습니다.
GEI는 기업의 혁신성과 성장률, 자본 등의 성장 가능성과 기술력, 인적 자본 등의 능력, 그리고 창업의 기회, 문화적 지원 등 사회적 환경을 종합해 산출됩니다. 주목할 것은 한국의 GEI를 구성하는 요소별 특성입니다. 한국은 제품 혁신과 공정 혁신에서 100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지만, 기회와 경쟁 그리고 문화적 지원(Cultural Support) 부분에서는 20~30점의 낙제점 수준의 점수를 획득하는데 그친 것입니다. 특히 기업가에 대한 사회의 호감도를 뜻하는 문화적 지원 부분은 지수가 산출되기 시작한 2012년 이후 평가 항목 중 유일하게 계속 악화됐습니다.
세계기업가정신 발전기구 졸탄 액스 대표(미 조지메이슨대 교수)는 "한국의 기업가정신은 울퉁불퉁한 바퀴(Spiky bad wheel)"라고 표현하며 "망가진 바퀴로는 기업이, 국가 경제가 앞으로 굴러가기 힘들다"고 설명했습니다. 액스 교수는 "기업가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조하고, 그것을 통해 부를 만들어 내는 것에 한국 사회의 지지는 인색하다"며 "기업을 규제하는 정부, 그리고 대중의 반기업 정서가 지금 상태로 유지된다면, 한국 기업이 이전과 같은 발전을 보여주기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습니다.
◆ 반기업정서 개선 없인 `4차산업 지진아` 못 면할 것
세계 경제지도는 급변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자유무역체제의 중심이었던 미국이 `자국 우선주의` 기치를 내걸며, 세계 경제·통상 질서는 변화가 불가피해졌습니다.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 중 처음으로 기업가정신 확산을 위한 전담 보좌관을 신설했고, 취임 이후 가진 대기업 CEO들과의 조찬 모임에서는 20%에 가까운 법인세 인하와 각종 규제 철폐를 약속했습니다.
다른 선진국들도 자국 기업을 불러들이는 유인책을 적극 내세우고 있습니다. 독일은 사물인터넷과 빅데이터 등 첨단기술을 갖춘 `스피드 공장`을 세워 아디다스가 24년 만에 자국으로 생산 기지를 옮길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고, 프랑스는 정부 차원에 전담기구를 설치해 자국 생산 제품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식으로 기업들의 유턴을 지원했습니다. 법인세 혜택 확충은 미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 영국, 스위스 등 세계 주요 국가들의 공통된 정책기조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세계적 흐름에 대응하기는 커녕 반기업 정서란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선주자들이 경쟁적으로 4차산업 육성을 외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들 역시 반기업정서의 굴레를 강하게 조이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뒤늦게나마 출범을 준비하고 있는 인터넷은행은 거대자본의 전횡운운하는 정치권의 고집으로 `은산분리`라는 틀을 뒤집어쓴 채 사실상 제구실을 못할 처지에 놓였고, 빅데이터 분야는 개인정보보호법에 막혀 제대로 된 수집과 활용조차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병태 카이스트대 교수는 "최근 대선후보들의 공약을 보면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스러운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며 "과거의 공급 위주의 관치경제 습성에서 벗어나고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는 것이 필요해보인다"고 조언했습니다.
한국경제TV 기획취재팀 조연·김치형·신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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