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부터 미국의 경제정책 우선순위가 통화정책에서 재정정책으로 바뀐다. 출범 이전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주력해온 대규모 세제 개편안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핵심은 법인세를 현행 35%에서 21%로 대폭 낮추는 내용이다.
세제 개편안의 이론적 근거는 1980년대 초 레이건 행정부가 추진했던 ‘공급중시 경제학(supply side economic)’이다. 당시 2차 오일쇼크 여파로 ‘스테그플레이션(경기침체에도 물가가 올라가는 현상)’이라는 정책적으로 대응하기가 어려운 상황에 부딪치자 대규모 감세를 통해 경제주체의 효율을 높여 성장률을 끌어 올리고 물가도 안정시켰다.
감세정책의 이론적 토대인 ‘래퍼 곡선(Laffer Curve)’을 보면 세율과 재정수입 간 정(正)의 구간을 ‘표준 지대(normal zone)’, 부(負)의 구간을 ‘비표준 지대(abnormal zone)’라 부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출마 이전부터 너무 높아 경제효율을 떨어뜨리는 세 부담을 낮춰줘야 경기가 살아나고 재정수입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봤다.
트럼프 정부가 출범 이후 국익 우선의 보호주의를 강조하고 2년 차에 세제 개편안을 추진하는 것은 ‘세계화(globalization)’에 대한 반성 때문이다.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성장격차가 축소됨에 따라 미국 등 선진국 학자를 중심으로 세계 경제의 추진력으로 간주되던 세계화를 보는 시각에 변화가 생겼다.
조셉 스티글리츠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은 주로 선진국의 보호주의 움직임에 초점을 두는 가운데 세계화의 퇴조 가능성을 주장했다. 반면 피터 만델슨 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의장 등은 세계화가 혁신 촉진, 생활수준 향상 등을 선진국과 개도국 모두에게 혜택을 주고 있어 후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세계화가 진전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는 소득격차가 현저하게 확대됐다. 1960년 선진국 소득의 8% 수준이었던 저소득 개도국의 1인당 GDP는 1990년대 말까지 1% 내외로 하락했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얼바인) 포메란츠 교수는 선진국 입장에서 ‘위대한 발산(GD·great divergence)`이라 불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는 사정은 달라졌다. 개도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선진국과의 소득격차가 축소됐다. 포스너의 기술격차이론에서는 후발국은 선발국의 지식과 기술을 흡수함으로써 압축성장이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즈(FT)의 칼럼리스트인 마틴 울프는 ‘위대한 수렴(GC·great convergence)’이라고 주장했다.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 간의 격차는 고용창출 문제에 있어서는 이전보다 훨씬 줄어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화 정도가 높은 미국 등 선진국일수록 경기회복에 따른 고용창출효과가 크게 떨어졌다. 2000년 이후 각국의 세계화 정도와 실업률 간의 산포도(scatter diagram)을 그려보면 뚜렷한 ‘정(正)의 관계’가 나타난다.
특히 세계화 진전에 따라 자국 내 주력산업으로 등장한 정보기술(IT)와 같은 증강현실 산업과 맞물려 `고용창출 없는 경기회복`이 더 뚜렷하다. 증강현실 산업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 경험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들 분야에서 취약한 청년층의 실업이 급증하는 추세다. 대부분 국가에서 청년 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2배 이상으로 높았다.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중하위 계층의 실업으로 미국 등 대부분 국가에서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심해짐에 따라 빈곤층인 BOP(Base of the Economic Pyramid) 계층이 급격히 확산되는 추세다. BOP란 소득 피라미드의 가장 낮은 쪽에 있는 계층으로 1인당 연간소득 3,000달러(1일 8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경제적 빈곤층을 말한다.
이 때문에 청년 실업과 빈곤층 확대가 선진국을 비롯한 대부분 국가에서 사회현안으로 대두됨에 따라 반작용과 재정부담 등이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특히 민주주의 본거지인 런던에서 폭등 사태가 발생한데 이어, 자본주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반월가(Occupy Wall Street) 시위’가 일어난 것이 각국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 오고 있다.
또 하나의 반작용은 증강현실 산업의 최대 이용자이자 피해자인 청년층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고 있는 신러다이트 운동이다. 신러다이트는 19세기 초 기계를 파괴시키자는 러다이트 운동에 빗대어 인터넷, IT 등을 파괴시키려는 움직임을 말한다. 일부에서는 각종 바이러스 전파, 디도스(DDos) 공격 등을 이 운동의 일환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갈수록 각국의 경기부양책에서 일자리 창출에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버락 오바마 정부는 미국이 금융위기 이전까지 주력해 왔던 세계화와 반대되는 ‘리쇼오링(resouring)’ 정책을 추진했다. 리쇼오링이란 세계화의 목표인 아웃 소싱의 반대 개념으로 해외에 나가있는 미국 기업을 각종 세계 혜택과 규제완화 등을 통해 불러들이는 정책을 말한다.
트럼프 정부가 세제 개편안 가운데 법인세 인하에 주력하는 것은 동일한 맥락이다. 특히 구글,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등과 같은 다국적 정보기술(IT)이 법인세가 높은 미국에서 얻은 지적재산권 사용료나 이자 등의 명목으로 법인세가 낮은 국가의 자회사로 넘겨 조세 회피하는 것을 막겠다는 목적이 강하다.
간단한 예로 다국적 IT 기업의 상징격인 구글이 세금을 피해가는 과정을 단계별로 살펴보자. 첫 사전준비 단계로 법인세가 낮은 국가에 사무실(아일랜드와 같은 조세회피지역)을 차리고, 그곳에서 구글의 자회사인 ‘구글 아일랜드’를 설립한다. 구글 아일랜드는 세계 구글이 벌어들이는 소득이 모이게 될 장소다.
그 다음 소득이전 단계로 구글 본사는 아일랜드에 미국을 제외한 해외법인의 소득원천을 넘긴다. 아일랜드는 전 세계 구글 서비스를 제공하는 해외법인으로부터 거액의 로열티를 받는다. 구글 본사 소재국인 미국은 세원 잠식이 당하는 대신 자회사가 있는 아일랜드는 소득 이전이 발생한다.
최종 조세회피 단계에서는 받은 로열티에 대해 법인세를 내는 게 원칙이지만, 구글 아일랜드는 조세회피지역에서 모든 업무를 총괄하므로 비거주자(외국인)로 간주돼 이 국가의 세법을 적용받는다. 조세회피지역의 법인세율은 아주 낮아 세금을 적게 낸다. 구글의 본사가 로열티를 받았다면 미국의 세법이 적용돼 법인세율 35%가 부과된다. 해당 기업은 ‘세금 절감’이고 미국 정부에게는 ‘조세 회피’다.
세계 3대 조세회피지역은 케이먼 군도, 말레이시아 북동부, 아일랜드가 꼽힌다. 최근에는 자본통제가 심한 말레이시아 북동부는 싱가포르와 홍콩 마카오로, 재정위기를 겪은 아일랜드는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로 이전하고 있다. 조세회피지역에 속한 국가는 구글 등과 같은 다국적 기업을 유치해 고용과 소득창출, 기술이전 등을 겨냥해 세금혜택을 부여한다.
1990년대부터 조세회피지역에 대한 세금부과방안을 고심해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국가 간 세원잠식과 소득이전(BEPS·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로 인한 법인세 수입 감소액이 매년 전 세계 법인세 수입액의 4∼10%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현재 IT 업종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조세회피기업도 다른 업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트럼프 정부는 미국의 법인세가 21%로 낮아질 경우 재정수지에 개선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세제 개편안에 따라 재정적자와 국가채무가 늘어날 것이라는 비판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다. IT 업종의 확산으로 모든 것이 보이는 증강현실 시대를 맞아 감소될 것으로 예상됐던 뇌물 공여가 오히려 증가하는 ‘부패 수수께끼(corruption conundrum)’ 현상도 풀릴 것으로 기대된다.
날로 심각해지는 청년 실업과 이에 따른 신러다이트 운동 등 기형적인 IT 급성장에 따른 사회병리현상을 줄이는 데에도 기여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정부의 법인세 인하를 금융위기 이후 각국이 추진해온 제조업 부활정책(미국의 경우 제조업 ‘리쇼오링’과 ‘리프레쉬’)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기업과 증시에도 도움이 된다. 법인세 인하로 미국으로 환류되는 조세캐리 트레이드(tax carry trade) 자금을 이용해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인수합병(M&A)를 통해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법인세 인하에 따른 달러 리쇼오링 효과를 3조 달러(원·달러 환율 1100원 적용 3300조원) 내외로 보고 있다.
미국 이외 국가가 비상이 걸렸다. 법인세를 내리지 않을 경우 자국 내 들어왔던 미국 기업과 달러를 한꺼번에 잃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독일, 프랑스, 일본 등 대부분 선진국이 법인세를 추가로 내리고 있다. 중국도 조만간 내릴 계획이다. 한국만이 법인세를 25%로 올리는 유일한 국가다.
중요한 것은 환율에 미치는 효과다. 작년 11월 이후 세제 개편안이 미국 하원, 상원을 거치면서 글로벌 환율 벤치마크 지수인 달러인덱스는 91에서 93∼94 레벨대로 상승했다. 법인세 인하로 미국으로의 자금이 환류되는 달러 리쇼오링 현상이 본격화될 경우 달러 수요가 증대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원·달러 환율은 마지노선으로 여겨왔던 1100원대마저 무너졌다. 주요 통화대비 달러 가치가 회복하는 속에 원화에 대해서는 약세를 보이는 환율왜곡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2016년 9월 이후 재 확대되고 있는 경상수지흑자와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인상 이후 달러 강세를 겨냥한 달러보유물량이 뒤늦게 출회되고 있는 것이 주요인이다.
Fed가 로드 맵대로 출구전략을 가져가고 트럼프 정부의 세제 개혁안이 추진될 경우 환율왜곡 현상인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가장 큰 대내외 환율왜곡 요인인 경상수지흑자부터 줄여 나가야 한다. 특히 우리처럼 ‘양극화형 흑자’는 질적으로 안 좋고 미국으로부터 환율조작 압력이 더 커질 수 있다.
원천 면에서 경상수지흑자가 당분간 줄어들 가능성이 적다면 운용 면에서 해외투자 활성화 등을 통해 국내 외환시장에 들어오는 달러 물량을 줄여야 한다. 국내 들어오는 외국인 자금은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권장하는 영구적 불태화 개입(PSI·permanent sterilized intervention)`도 공론화할 필요가 있다. PSI는 국부펀드 등을 통해 유입 외자에 상응하는 해외자산을 사들여 통화 가치의 균형을 맞추는 방안을 말한다.
전제조건도 충분히 갖추고 있다. PSI를 도입하려면 유동성이나 신용위험 면에서 외자를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외화유동성은 2선 자금까지 합치면 5000억 달러를 넘어 어떤 방식으로 추정된 적정외화보유액보다 많다. 이런 방안으로 환율왜곡 현상을 시정시켜야 문재인 정부가 지향하는 ‘공유(혹은 공생)경제’ 실현을 앞당길 수 있다.
마지노선인 1100원이 무너지자 올해 원·달러 환율이 1000원 마저 붕괴될 것이라는 예상도 재점검해봐야 한다. 한국과 미국 간 법인세율 역전 현상으로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자금이 미국으로 이탈될 경우 원·달러 환율이 상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글. 한상춘/<a href=http://sise.wownet.co.kr/search/main/main.asp?mseq=419&searchStr=039340 target=_blank>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scha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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