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피해 막아달라" 김지은 손편지 통해 호소한 내용 봤더니

입력 2018-03-12 23:34  


"저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습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되어 있습니다.…저에 관한 거짓 이야기들은 수사를 통해 충분히 바로 잡힐 것들이기에 두렵지 않습니다
. 다만 제 가족들에 관한 허위 정보는 만들지도, 유통하지도 말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의혹을 폭로한 김지은 전 정무비서가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2차 피해를 겪지 않게 도와달라며 12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손편지를 배포했다.
최근 미투 운동이 확산하면서 성폭력 사실을 공개하는 피해자들에 대한 2차 가해도 심각해지고 있다. 네티즌의 `신상털기`로 피해자의 각종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떠돌기도 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사귀는 사이라는 불륜설부터 정치 공작설에 이르기까지 확인되지 않은 각종 허위사실이 유포되기도 한다.
◇ 인터넷 댓글부터 수사·재판 기관에 이르기까지
2차 가해의 대상은 성폭력 폭로자에 그치지 않는다. 김 씨의 사례처럼 피해자의 가족에 대한 허위 정보가 퍼지기도 하고, 배우 고 조민기 씨의 경우처럼 가해자로 지목된 유명인들의 가족이 악성 댓글에 시달리기도 한다.
가해자와 가해 유형도 다양하다. 일반인들이 인터넷에 올리는 악성 댓글부터 주변인들의 방조와 비난, 가해자의 역고소,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수사 기관의 행태, 기업의 불이익 조치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피해가 발생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조차 없는 실정이다.
한국여성의전화가 2017년도 상담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 상담 869건 중 2차 피해 경험이 드러난 사례는 총 168건으로, 전체 피해 상담 중 19.3%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는 2차 피해 내용이 주된 상담 내용에 포함된 사례만을 집계한 것이어서 2차 피해 발생 비율은 훨씬 더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형별로 보면 피해자나 가해자의 주변인과 가족에 의해 발생한 것이 44.5%로 가장 많았다. `네가 참아라`, `없던 일로 하라`며 사건을 은폐하거나 외면하는 사례가 많았다.
직장에서 2차 피해를 겪은 경우는 18%(38건)로 그 뒤를 이었다. 사건 처리 과정에서 회사가 가해자의 실명을 언급했다는 이유로 피해자를 고소하거나 고용주가 검찰 기소 전 신고를 철회하라고 강요·협박하는 사례 등이 있었다. 피해자가 부당한 인사 등 각종 불이익 조치를 당하는 경우도 많다.
경찰, 검찰, 법원 등 수사·재판과정에서의 2차 가해도 17.5%(37건)나 됐다. 신고 접수단계에서 경찰이 `모텔 가는 것 자체가 동의 아니냐? 왜 처음부터 신고하지 않았느냐`, `신고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고 무고죄가 될 수도 있다`는 등의 말을 하며 피해자를 위축시키거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사례들이 있었다. `여성이 술을 마시고 성관계를 맺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며 재판과정에서 판사나 변호사가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이 드러나는 발언을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 등을 이유로 한 가해자의 역고소도 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2차 피해다.
한국여성의전화 관계자는 "가해자에게 `매뉴얼`처럼 자리 잡은 역고소로 인해 피해자는 정서적·경제적 피해뿐 아니라 성폭력 피해 자체가 부정되는 극심한 고통에 놓이게 된다"며 "이런 현실은 결국 피해자가 피해를 제대로 말할 수 없게 하고, `폭로`나 `익명 고발` 등 다른 방법을 이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 "2차 피해 방지,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인식 변화가 가장 중요"
이처럼 성폭력 피해자가 겪는 2차 피해가 미투 운동 확산과 함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자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들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12개 관계부처로 구성된 `범정부 성희롱·성폭력 근절 추진 협의회`는 지난 8일 발표한 성폭력 근절대책에서 피해자에 대한 악성 댓글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구속수사 하는 등 엄정하게 대응하고, 가해자의 역고소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 피해자의 폭로에 대해서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를 적용하지 않는 쪽으로 법 해석을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국회에서는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죄 처벌 대상에서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경우를 제외하는 형법 개정안이 발의됐고,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죄를 처벌하는 규정을 아예 삭제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다만 여성계 내에서도 이를 삭제할 경우 피해자에게 오히려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여성계에서는 가해자가 정확한 근거 없이 방어 차원에서 역고소하는 경우 가중처벌하는 방안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검찰·경찰 수사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막기 위한 방안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여성단체들은 미투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여성폭력 범죄를 담당하는 수사 기관에 의한 2차 피해의 심각성을 지적하면서 경찰청 훈령 등을 통해 피해자를 보호하는 관점에서 여성폭력 범죄 수사 규칙을 제정하고, 여성폭력 사건에 대한 상세한 대응 지침을 담은 실무 매뉴얼을 제작할 것 등을 요구해왔다.
여성가족부도 현재 검찰과 경찰에서 운영하는 피해자 보호 관련 교육과정은 교육대상자가 소수로 한정되어 있고 의무교육도 아니라는 점에서 효과성이 높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여성폭력 범죄 수사과정에서의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교육을 강화할 것을 경찰과 검찰에 권고했다.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대책과 제언이 나오고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폭력을 바라보는 뿌리 깊은 왜곡된 의식을 바꾸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가 심각해진 것은 이를 방지하는 제도가 미흡해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왜곡된 인식 때문이라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여성민우회 정예원 활동가는 "다른 범죄와 달리 성폭력에 대해서는 잘못된 통념이 강해서 피해자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피해자를 의심하거나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며 "아무리 많은 대책이 나와도 사회 전반에 뿌리박힌 성폭력에 대한 왜곡된 통념이 변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노선희 씨는 "2차 가해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2차 가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시민 의식이 문제"라며 "무심히 쓴 글들을 죄책감 없이 올리고 이에 호응하는 것 자체가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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