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의 시작. 그 시작은 1960년 치러진 3.15 부정선거였다.
19일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당시 대통령과 이기붕 국회의장의 당선을 위해 치밀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고, 온갖 방법을 쓴 끝에 이승만 대통령 후보가 85%, 이기붕 부통령 후보가 73%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부정선거가 자행된 선거일 밤 경남 마산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시민들을 향해 발포해 8명이 숨지고 80여명이 다쳤다. 이를 제1차 마산의거로 부른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4.19는 1960년 4월 19일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돼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을 말한다.
이승만 정권이 불법적인 개헌을 통해 12년 동안 장기집권하자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인 일이다.
1960.3.15 제 4대 정 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된 선거에서 자유당은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그러자 같은 날 마산에서 시민들과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위를 벌이자 당국은 총격과 폭력으로 강제 진압에 나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무고한 학생과 시민을 공산당으로 몰면서 고문을 가했다.
이후 1960.4.11 1차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발견됨으로써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제 2차 시위가 일어났다.
1960.4.18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고 학교로 돌아가던 중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일부가 피를 흘리며 크게 부상당했다.
이에 분노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이 다음날인 1960.4.19 총 궐기하여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 "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여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1960.4.25 독재정권의 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 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 시민들과 시위에 동참했고 1960.4.26 전날에 이어 서울 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무력에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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