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불닭' 개발자들, 매운 라면 하루에 몇 개?
밥 대신 'No'..한 그릇에 담긴 '재미'
한 젓가락만 입에 넣었을 뿐인데 땀 구멍이 송송 열리는 매운 맛, 점잖은 신부님도, 베테랑 진행자들도 '핵불닭볶음면' 한 입을 넣고 어쩔줄 몰라한다. 김치는 상대도 되지 않는 한국식 '파이어 누들'에 도전하려는 전 세계 유튜버들의 영상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다. 맛에 중독성이 있다고만 하기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 왜 매운 라면이 국경을 넘어 수 년째 인기를 유지하고 있을까? 대체 개발자들은 이 매운 라면을 매일 먹고도 괜찮을까?
꼬리를 무는 궁금증을 풀기 위해 문제의 '불닭볶음면'을 만든 식품연구소를 찾았다. 원주 외곽에 위치한 공장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풍기는 매콤달콤한 향이 코끝에 간지럽힌다. 원조 라면 공장이니 베테랑들에게 그냥 인터뷰할 수는 없는 법, '매운 라면' 한 그릇을 볶아들고 연구소 직원 한 분씩 찾아 물어보았다. 하루에 라면 10개쯤은 기본이라는 20년 베테랑 연구소장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입사 3개월차 신입 연구원부터 9년차 고참 개발자들까지 태반은 '핵불닭'의 매운 맛에 쩔쩔매며 인터뷰를 했다. 자체 요리대회 최우수상이라는 김인경 개발팀 연구원은 "모든 연구원들이 매운 맛을 잘 먹지는 못하지만, 라면에 다양한 맛을 담아낼 수 있는 배경이 된다"고 너스레를 놓았다.
이들 연구원들의 고통 속에 만들어진 '파이어누들'은 '챌린지'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며 불과 5년여 만에 라면 시장의 소비 트렌드를 완전히 뒤바꿔놨다. 본래 한국식 라면은 1960년대 쌀밥을 대신할 목적으로 처음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얼큰한 국물에 송송 썰린 채소들, 젓가락 위에서 탱글탱글 춤추는 면발의 삼박자로 소비자를 유혹해왔다. 하지만 2016년 연간 2조 원을 돌파했던 국내 라면 매출은 이때를 정점으로 완만하게 하락하는 추세다. 끼니 대신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 '별미'로 색다른 라면을 찾는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그 빈틈을 파고든 라면이 바로 '불닭' '마라' '고추' 등을 내세운 매운 라면들이다.
이런 추세는 점유율 변화로도 나타난다. 10년 전 만해도 한국 라면시장 브랜드 순위를 보면 국물 라면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소매점 라면판매 순위 변화를 보면 한때 라면 브랜드 순위 10위를 장악했던 신라면, 너구리 판매량이 서서히 줄고 오뚜기 진라면, 미역국 라면(2위, 10위), 삼양라면, 불닭볶음면(7위, 9위), 팔도 왕뚜껑(8위)이 약진한 것으로 나타난다. 증권업계에서는 올해 연말이 되면 마케팅 비용으로 점유율은 방어하고 있는 농심보다 2, 3위 업체들의 영업이익이 높게 나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라면 회사들도 쩔쩔맬 만큼 달라진 소비 현상을 주도하고 있는 계층은 바로 밀레니얼 세대다. 라면이 귀했던 베이비붐 세대와 달리 이들의 자녀들에게 라면은 '펀(fun)'한 요리의 하나일 뿐이다. 삼양식품이 2012년 한정판으로 선보였던 '불닭볶음면'은 해외 유튜버와 인플루언서들의 '매운 라면 도전'이라는 후기를 양산하며 젊은 소비자들을 끌어모았다. 이 회사는 이후 불닭볶음면과 까르보나라 스파게티의 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2030 소비자들의 요구에 맞춰 한정판 '까르보불닭볶음면'을 정식 출시하거나, 요즘 유행인 '마라'맛 등 10여종의 한정판 제품을 추가해 가며 판매량을 늘려왔다. 시대에 맞춘 마케팅 덕분에 불닭볶음면의 지난해까지 누적 매출은 1조 원, 180억 봉이 팔려나갔다. 게다가 전체 생산량의 60%는 중국, 베트남, 동남아, 미국 등지에서 팔릴 만큼 라면 수출의 한 획을 그은 상품으로 평가받는다.
경쟁사들도 발빠르게 변하기 시작됐다. 불닭볶음면에 자리를 뺏겼던 여름 별미 팔도 비빔면은 '멍멍이'를 '댕댕이'로 부르는 밀레니얼 세대들의 작명을 따라 '괄도네넴띤'이라는 파격적인 디자인을 선보이며 화제를 모았다. 과거의 제품을 리뉴얼한 레트로 감성에 맞추기 위해 식품 포장을 바꾸거나, 희소성에 주목한 세대에 맞춰 온라인에서만 한정판매하는 등 라면 판매 전략도 크게 변화하는 추세다. 간편하게 즐기는 '라면 한 그릇'도 독특한 재미를 찾는 시대. 어쩌면 라면 회사만의 일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나고 소통해야 할 기업들이 배워야 할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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