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2일 국회를 찾아 내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여야는 첨예한 대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10시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면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이인영 원내대표 등 여당 의원들과 웃는 얼굴로 인사를 나눈 뒤 민주당 의석을 가로질러 연단에 올랐다.
남색 정장에 줄무늬 넥타이 차림의 문 대통령은 다소 결연한 표정으로 10시 2분 연설을 시작했다. 여야 의원들은 모두 기립했다가 연설이 시작하자 착석했다.
문 대통령은 다양한 손짓을 섞어 연설하면서 "지금은 우리가 가야 할 목표에 대해 다시 한번 마음을 모을 때"라며 야당을 바라봤다.
연설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한 PPT를 100여장 가까이 띄웠고, `혁신`과 `포용`, `공정`, `평화` 등 주요 키워드는 더욱 힘줘 말했다.
민주당 의원들과 국무위원들은 문 대통령이 소재·부품·장비 산업 국산화 성과를 설명하는 대목에서 처음 박수를 보낸 데 이어 33분간의 연설 동안 모두 28번의 박수로 호응했다.
2017년 시정연설에서 15번, 2018년 시정연설에서 21번 박수가 터졌던 것과 비교하면 횟수가 더 늘었다.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 결과, 내년도 확장예산 중요성, 일자리 개선 상황, 기초연금 인상과 무상교육 계획 등을 소개할 때와 한반도 평화 정책에 대한 북한의 호응을 촉구하는 대목 등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반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박수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문 대통령이 "청년 고용률이 12년 만에 최고치를 보였다"고 말할 때 "에이∼"라며 웅성거린 것을 시작으로 국방의무 보상 계획 등의 대목에서 수차례 야유를 보냈다.
한국당의 야유를 들은 문 대통령은 특별한 동요 없이 몸을 좀 더 야당 쪽으로 돌려 연설을 계속했다.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유한국당 민경욱 의원등이 문재인 대통령의 공수처 관련 발언을 들으며 엑스표를 그리고 있다/연합뉴스)
여야의 대치가 절정에 이른 것은 문 대통령이 공정·개혁을 강조하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치 필요성을 역설할 때였다.
문 대통령이 "정부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만연한 특권과 반칙, 불공정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국민의 요구는 그보다 훨씬 높았다"고 말하자 한국당에서는 "조국!"을 외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 대통령이 연설을 이어가자 한국당 한 의원은 "그만 하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수처법과 검경수사권 조정법안 등 검찰개혁 법안을 국회에서 조속히 처리해달라고 당부하는 부분에서 한국당의 야유 소리가 가장 높아졌다. 이에 맞서 민주당과 국무위원들의 박수 소리도 커졌다.
일부 한국당 의원들은 손으로 `X`(엑스)자를 만들어 문 대통령에게 반대의 뜻을 표시했고, 손으로 귀를 막으며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야당 의원들을 계속 바라보며 연설을 계속했다.
이어 문 대통령이 국회 계류 법안 통과 필요성을 말하자 한국당 의원들은 "야당을 우습게 안다", "협치를 하라"고 고성을 냈다.
박수와 야유가 엇갈리는 가운데 문 대통령은 10시 35분 연설을 마쳤다.
`태극기 변화상` 영상이 흐르는 화면을 배경으로 문 대통령이 연설을 마무리하자 민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마지막 박수가 쏟아졌다. 바른미래당과 정의당, 민주평화당 일부 의원들도 함께 박수를 보냈으나 한국당 의원들은 끝내 박수를 보내지 않았다.
문 대통령은 연단에서 내려온 뒤 한국당 의석을 통해 본회의장을 나섰다. 이 과정에서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와 정양석 원내수석부대표, 강석호·김성태·김세연·김현아·이주영·홍문표 의원 등 야당 의원들과 악수했다.
다만 야당 의원들 대부분이 연설이 끝나자마자 바로 등을 돌리고 퇴장해 문 대통령은 떠나는 야당 의원들에게 다가가 `머쓱한 악수`를 나누는 모양새였다.
문 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악수했지만 야당 의원들은 다소 굳은 표정이었다.
이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민주당 의원들과도 한차례 악수와 함께 짧은 대화를 나눴다.
문 대통령은 특히 지난 15일 `정치의 한심한 꼴 때문에 많이 부끄럽다`며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이철희 의원에게 "섭섭해요? 시원해요?"라며 소회를 물었다.
이 의원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고, 문 대통령도 미소를 머금은 채 이동해 다른 의원들과 인사한 뒤 국회 본회의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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