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물 WTI(서부텍사스산 원유)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10.15달러, 24.6% 급락한 31.13달러에 마감했다. 걸프전 당시인 1991년 1월 17일 이후 30년 만에 가장 큰 하락률을 보인 것이다. 국제유가의 기준물인 5월물 브렌트유도 런던 ICE 선물거래소에서 10.9달러, 24.1%나 내려앉으며 34.28달러에 거래됐다.
이는 지난 6일, OPEC(석유수출국기구)과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들의 모임인 OPEC+ 회의에서 감산 합의에 실패한 영향이다. 러시아의 반대로 감산 합의에 실패하면서 사우디는 이튿날 전격적으로 석유증산과 원유공식판매가격(OSP)을 배럴당 6~8달러 인하한다고 발표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됐다. 사우디가 이날 발표한 가격 인하는 20년 만에 가장 큰 폭이었다.
적절한 수준의 유가 하락이야 경제를 촉진하는 효과가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수요 부족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사우디의 수출 가격 인하 조치는 러시아와의 가격전쟁 조짐으로 해석되면서 불안을 증폭시킨 셈이다.
유가 전쟁의 향방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사우디와 러시아의 합의 없이는 정유화학 업종 모두 저유가에 의한 가수요 부재, 실수요 부진, 신증설 물량 등 `삼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는 암울한 분석이 나오는 상황이다.
2020년 OPEC 회의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김광래 삼성선물 연구원은 11일 자 보고서에서 OPEC 회의에서 발생한 사우디와 러시아간 감산합의 실패와 관련한 막전막후의 상황을 "OPEC 맹주국인 사우디와 비OPEC 맹주국인 러시아 간의 불협화음은 갑작스럽게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적극적인 감산을 주도하며 생산 쿼터보다 많은 수준을 감산해왔던 사우디는 지난 1월부터 시행된 하루 170만 배럴 감산에서도 자발적으로 일일 40만 배럴을 추가 감산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달랐다. 감산 이행을 매번 약속만 할 뿐 2017년 감산 합의 이후 실제 생산쿼터를 지킨 것은 단 두 달 밖에 없었다. 자국 내 수요 증가와 생산 차질 등을 빌미로 매번 약속을 파기해왔다. 하지만 러시아를 내칠수도 없는 상황. 비OPEC 국가들의 생산 증가와 OPEC의 감산 영향력 감소로 사우디 혼자만으로 세계 최대 카르텔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었기 때문.
그러나 이번 OPEC 회의에서는 사우디의 태도가 다른 때와는 사뭇 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OPEC 정례회의는 이틀간 진행되는데, 첫날은 OPEC들이 다음날에는 OPEC+가 회의를 진행한다. 사전 합의를 마치고 의례적인 회의를 거쳐 OPEC+ 최종 합의에 원만하게 도달했던 과거와는 달리 OPEC 국가들이 먼저 하루 150만 배럴 추가 감산안 (하루 100만 배럴은 OPEC, 50만 배럴은 비OPEC)에 합의를 한 뒤 러시아에게 공개적인 합의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러시아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4월부터 각국들은 상황에 맞게 생산을 조정해야 한다고 선언했고, 사실상 기존 170만 배럴 감산 기한 연장에도 선을 그었다.
국제유가를 대하는 자세..."사우디와 러시아 달라"
김광래 연구원은 이번 사태와 관련해 "OPEC과 러시아는 유가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김 연구원에 따르면 OPEC 국가들의 평균재정 균형 유가는 95달러 선이다. 전체 세입에서 원유가 차지하는 비중도 80~90% 이상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 재정 균형 유가는 40달러에 머문다. 원유 관련 세입은 전체의 20%에 불과하다.
그는 보고서에서 "OPEC의 경우 유가 지지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인 반면 러시아는 의존도가 높은 품목 중 하나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러시아 외화보유액은 5,700억 달러로, 사우디 5,000억 달러보다 높고 사우디를 제외한 나머지 OPEC 국가들의 외화보유액을 모두 합해도 러시아의 외화보유액에 미치지 못한다.
재정균형 유가를 하회할 경우 OPEC 국가들은 국채매각이나 국영자산 매각 또는 외화보유고 소진 등을 통해 버텨나가야 한다. 사우디와 UAE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재정상황이 매우 취약한 상황. 김 연구원은 "사우디의 원유증산 발표가 단순히 러시아를 다시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기 위한 겁주기 용인지, 본격적인 치킨게임의 시작인지는 좀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현재 수준의 유가가 지속될 경우 러시아에게도 타격이 가해지겠지만 원유 관련 수입이 전체 세입의 85%에 달할 정도로 원유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사우디를 비롯해 알제리, 콩고, 가봉, 적도기니 등 취약국들은 수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채무 불이행 선언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우디와 러시아의 진짜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서 이 부분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김 연구원은 덧붙였다.
과거 유가폭락 사례...2020년 사태 정유화학업종 영향 분석
이번과 같은 유가 급락은 2000년 이후 몇 차례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8년과 2014년이다. 2009년 1월 두바이유는 배럴당 40달러를 하회하며 전년도 7월 고점 대비 70% 이상 급락했고, 2015년 1월에도 배럴당 45달러로 떨어지며 전년도 7월 고점 대비 60% 이상 하락했다.
김정현 교보증권 연구원은 11일 자 보고서에서 "지난 2번의 유가 급락 사태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2008년에는 유가급락에도 화학 마진·정제마진 모두 크게 개선되지 못했으나 2014년에는 원재료 절감에 따른 수혜를 시현하며 정유화학 업종의 대세 상승의 시작점이 됐다"며 두 사태의 차이점을 언급했다.
두 시기의 차이점은 유가 급락 계기·수요·공급(증설) 등의 측면에서 기인한다. 2008년에는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급격한 수요 위축 우려로 유가가 급락했으나 2014년에는 미국의 쉐일 오일 등 비전통적인 에너지 생산이 증가하고 OPEC 회원국들의 감산 합의에 실패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또한 2008년에는 화학 수요 성장의 대체 지표인 글로벌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했으나 2014년에는 원유 수요 성장과 경제성장률 모두 견조하게 유지됐다. 게다가 2008년에는 정유·화학 모두 증설 부담이 부담스러운 수준이었으나 2014년에는 신규 증설 부담이 크지 않았다는 것도 다르다.
김 연구원은 "이번 유가폭락 사태는 2008년과 2014년과 같으면서도 다르다"고 분석한다. 우선 최근 유가급락의 원인은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수요 위축 우려 속에서 OPEC+의 감산 합의 실패가 동시에 작용했다는 점을 꼽았다. 3월 이후 글로벌 전망 기관들은 원유 수요 전망을 일제히 하향하고 있으며, OECD는 3월 이후 2020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기존 2.9%에서 1.5%로 낮추며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예상하는 상황 때문이다.
김정현 연구원은 보고서에서 "러시아와의 극적인 합의가 없을 경우 급락한 유가는 약보합을 유지하고 이는 정유·화학 업종에 모두 부정적일 것"이라고 평가했다. OPEC+ 공조가 무너질 경우 미국 증산에 대응하여 글로벌 유가수급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사라지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우디는 4월 OSP를 배럴당 6달러 이상 공격적으로 인하하고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의 증산을 예고하는 등 러시아의 전략 철회를 위한 벼랑 끝 전술을 시도하고 있으나, 9일 러시아 재무부 장관은 배럴당 25~30달러 수준의 유가를 감수할 체력이 있다고 발표하며 강대강 모습을 보였다.
유가전쟁, 앞으로 향방
국제유가가 폭락하면서 사우디와 러시아간 본격적인 ‘유가 전쟁’이 시작될 수 있다는 우려감이 고개를 들고 있다. 러시아가 석유 감산에 반대하고, 공급 과잉 문제가 계속되면 세계 경제에 큰 위험을 초래할 것이란 위기감이 고조되는 것.
미국 뉴욕타임스는 "러시아와 사우디가 당장의 갈등을 해결하더라도 세계적인 석유 과잉 문제는 수년간 유가를 낮게 유지할 수 있다"면서 "많은 소규모 미국 석유회사들은 파산할 수밖에 없고 더 큰 석유회사들은 수익을 보전하고 고용을 유지하는 데 위험을 겪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장의 키는 러시아가 쥐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인 가운데 유가 하락을 지지해 왔던 트럼프 대통령도 최근 급격하게 악화된 코로나19로 인한 수요 급감과 미국 내 지역 감염 통제에 힘을 써야 하기 때문에 과거처럼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올리는 전략이나 추가 제재를 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김 연구원은 "4월까지는 시간적 여유가 있기 때문에 러시아와 사우디의 극적 합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면서, "만약 만남이 이루어 질 경우, 기존 감산 합의 연장 또는 추가 감산 합의에 나설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예상했다.
한국경제TV 증권부 송민화 기자
mhsong@wowtv.co.kr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