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올해 하반기 경제정책 운용계획에서 디지털 엔화 도입 방침을 확정했다. 지난 5월 중국이 쑤저우, 선전, 청두, 슝안 신구 등 4개 지구에 디지털 위안화를 시범 운용한 한 이후 두 번째다. 디지털 위안화가 의외로 빨리 정착됨에 따라 엔화의 위상이 흔들리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도입될 디지털 엔화는 디지털 위안화와 마찬가지로 종전의 가상화폐와 페이스북이 계획하고 ‘리브라’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차원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 실물 화폐와 달리 자체적으로 가치가 없는 화폐가 교환 수단, 가치 저장, 회계 단위 등과 같은 3대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발행기관과 법정화 여부가 중요하다. 디지털 엔화는 일본은행이 직접 발행하는 ‘중앙은행 디지털 화폐(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로 두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현재 통용되는 엔화와 디지털 엔화를 1대 1로 교환해 구권을 신권으로 교체할 때 단행하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거래 단위 축소)’에 대한 우려도 불식시켰다. 일본은행이 발행한 디지털 엔화를 시중은행을 통해 현재 엔화를 예치한 만큼 금융 소비자(고객)의 전자수첩에 넣어줘 사용토록 하는 국가결제 시스템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는 은행이 빠질 것으로 예상된다.
디지털 위안화에 이어 디지털 엔화 도입이 확정됨에 따라 각국 중앙은행도 디지털 통화를 도입하기 위해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보다 앞서 스웨덴은 지난 2월부터 ‘e-크로나’를 도입했다. 지난 2개월 동안 시범 운용한 결과가 기대보다 훨씬 좋아 전 국토로 확대할 방침을 확정했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세계 모든 중앙은행의 80%가 도입을 전제로 디지털 통화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마존, 구글 등 민간 권력이 국가 권력까지 넘보는 것을 견제할 목적으로 페이스북의 리브라 발행을 불허하는 트럼프 정부의 방침에 따라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미국 중앙은행(Fed)도 ‘디지털 달러’ 도입을 앞당길 가능성이 높다. 가뜩이나 미국 중앙은행(Fed)는 코로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최종 대부자 역할(lender of last resort)을 포기하고 ‘무제한 달러화 공급’이라는 1913년 출범 이래 가보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
달러화가 많이 풀릴 경우 가장 우려되는 부작용은 ‘트리핀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트리핀 딜레마란 벨기에 경제학자인 로버트 트리핀이 처음 주장한 것으로 미국은 경상수지적자 등을 통해 달러화를 계속 공급해야 하지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대외 신뢰도가 떨어져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Fed의 무제한 양적완화로 달러 가치를 더 이상 유지하지 못할 경우 기축통화국인 미국인 더 이상 ‘글로벌 시뇨리지(화폐발행차익)’ 특권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 반면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담했던 과다 달러화 보유 구속. 즉 달러 함정(dollar’trap)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특히 중국이 그렇다.
Fed가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한 가장 간단하고 손쉬운 방법은 풀린 달러화를 환수하는 출구전략이다. 하지만 2015년 12월 금리인상 이후 추진됐던 출구전략 추진 과정에서 입증됐듯이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다. 미국 학계를 중심으로 달러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화폐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크게 두 가지 방안이다.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선호하는 ‘금본위제 부활’이다. Fed가 달러화 공급 계획이 발표될 때마다 금값이 오르는 것도 이 요인이 한 몫하고 있다. 하지만 절대적인 금 공급량 제한과 금 보유국에게 또 다른 특혜가 집중된다는 점에서 실행에 옮기기는 사실상 어렵다.
다른 하나는 ‘디지털 달러화’ 도입을 앞당기는 방안이다. Fed는 디지털 통화 시대가 닥칠 것에 대비해 오래전부터 대책반을 구성해 준비해 왔다. 현재 통용되는 달러화와 별도로 ‘디지털 달러화’를 언제든지 발행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와있다는 평가다. 페이스북의 ‘리브라’를 디지털 달러화로 격상시키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으나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적 입장을 감안하면 직접 도입하는 방식을 채택할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엔화에 앞서 도입된 디지털 위안화가 의외로 빨라 정착됨에 따라 ‘디지털 달러화’와 또 다른 형태의 기축통화 전쟁이 앞당겨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진핑 체제 출범 이후 중국은 일대일로(一帶一路) 계획, IMF(국제통화기금)의 SDR(특별인출권) 편입,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설립 등을 통한 위안화 국제화 과제를 꾸준히 추진해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국의 위상에 걸맞은 영향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해 왔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가장 먼저 들이닥칠 디지털 국제통화질서에서 디지털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구축할 경우 중국은 글로벌 화폐발행차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금융시장에서 자국 금융사의 자금조달 효율성과 편리성을 도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이 디지털 엔화 도입을 앞당기는 것도 같은 목적이다. 글로벌화가 급진전되기 시작한 1990년 이후 미국은 글로벌 화폐발행차익을 연간 23∼118억 달러로, 전체 조세수입의 0.4∼1.8%에 달하는 큰 혜택을 누린 것으로 추정된다.
디지털 통화 시대가 전개될 경우 각국 중앙은행은 ‘통화정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또 다른 과제를 해결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네트워킹 효과와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디지털 통화 시대에 있어서는 각국 중앙은행은 전통적인 목표인 ‘물가 안정’에만 둘 수는 없다. 아마존 효과 등으로 물가가 크게 올라갈 가능성이 적을 뿐만 아니라 기준금리 변경, 유동성 조절 등과 같은 종전의 통화정책 수단도 무력화되기 때문이다.
통화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른 경제주체도 공유가 가능해 짐에 따라 ‘정보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한 중앙은행의 시장 주도 기능도 약화될 수밖에 없다. 즉, 중앙은행과 시장 참여자 간 관계가 ‘수직적’이 아니라 ‘동반자적’으로 변한다는 의미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 위상, 금융시장 효율성 지표인 기준금리와 시장금리 간 체계는 약화가 불가피하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각국 국민이 적응할 수 없을 정도로 환경이 급변함에 따라 ‘새로움과 복잡성’에 따른 위험이 증대되고. 화폐개혁 논의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유사 금융행위도 판치게 된다. 이런 환경에 맞춰 금융 감독이 새로운 방식, 이를 테면 옴니버스 방식 등으로 접근하지 못할 경우 각국 국민의 화폐생활에 있어서는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도 앞으로 화폐개혁 논쟁은 국민의 저항이 높은 ‘리디노미네이션’보다 ‘디지털 원화’를 도입하는 쪽으로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주무부서인 한국은행은 ‘디지털 원화’를 발행할 것인가를 시작으로 중앙은행 목표 수정, 디지털 통화지표 개발, 통화유통속도와 통화승수 무력화 방지, 통화정책 관할 범위 확대, 통화정책 전달경로 유효성 점검, 경기 예측력 제고 등의 과제를 사전해 준비해 놓아야 한다.
한상춘/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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