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에 대한 갈망·삶의 회한 담겨
A와 B는 바라던 배역으로 무대에 서지 못한 채 죽은 귀신이다. C는 살아있지만 주인공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분투하는 배우다. 병원에서 갓 나온 D는 배역을 빼앗겼다는 망상에 사로잡힌 C의 프롬프터(관객에게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대 위 배우에게 대사나 동작을 일러 주는 사람)다.
독재정권 시절 연극을 한 A는 늘 프롬프터를 맡은 탓에 무대 위에선 제대로 대사를 내뱉은 적도, 여자 역을 맡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주인공 역에서부터 단역까지 대사와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해내 연기할 만큼 열정이 넘친다.
"작은 배우는 있어도 작은 역할은 없다"고 말하는 A. 살아 생전 무대에 제대로 서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분장실 귀신으로 남았다.
B 또한 살아생전 선망하던 니나 역을 맡지 못했다. 시간 날 때 마다 계속 화장을 고치는 B는 죽어서도 니나 역을 꿈꾸며 C의 소품 하나하나에 탐을 낸다.
"너는 연극한다는 애가 스따니슬랍스키를 몰라?"라는 A의 핀잔에도 "뭐, 연기를 머리로 해?! 그런 말 몰라도 잘 할 수 있어!"라고 당당하게 외치는 B. 백치미에 천연덕스럽기까지한 B의 코믹함에 객석은 팝콘 터지듯 곳곳에서 웃음이 터진다.
B와 D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젊은 여주인공 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려는 C의 삶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다.
“여배우로 산다는 거 잔인해. 내려놓아야 할 것도 많고. 젊음이라는 게 영원하지 않지. 해마다 내 몸이 날 배신하는 것 같고.” C가 푸념하듯 내뱉는 대사 속에선 나이가 들수록 주인공역에서 밀려날 것이란 두려움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D는 망상에 시달린다. C에게 "니나 역이요, 이제 저한테 돌려주셔야죠"라고 우길 만큼 정신이 온전치 않다. 하지만 당돌하기도 하다. "언니(C) 나이에 니나는 힘들고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대놓고 말한다.
죽어서도 놓지 못하는 무대에 대한 갈망, 그리고 4명의 여배우가 분장실에서 털어놓는 속내를 듣노라면 100분이 훌쩍 지나간다. 동시에 배우로서의 삶의 애환은 우리의 삶까지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배역에 대한 이들의 집착이 볼썽사납기 보다는 공감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연극 `분장실`은 올해 4월 타계한 일본의 유명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대표작이다. 1977년 초연 이후 일본에서 누계 상연횟수가 가장 많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오는 9월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분장실`은 A역에 서이숙과 정재은, B역은 배종옥과 황영희, C역은 손지윤과 우정원, D역은 지우와 이상아가 더블 캐스팅됐다. 9월에는 남자배우 버전도 개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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