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유럽에 판매하는 천연가스 대금을 자국 통화 루블로 결제받는 방안을 제도화했다.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은 루블화 결제 요구가 계약 위반이자 협박이라며 반발했다.
러시아 크렘린궁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이른바 `비우호국` 구매자들이 이달 1일부터 러시아 가스 구매 대금을 러시아 통화인 루블로 결제하도록 하는 대통령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인테르팍스 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항공산업 발전을 위한 회의에서 이같이 전하면서 "러시아에 비우호적인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 은행에 가스대금 결제를 위한 계좌를 개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비우호국 출신 구매자들이 새로운 결제 조건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현 가스 공급 계약은 중단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동시에 러시아는 합의된 규모와 가격에 따라 가스공급을 계속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방 국가의 제재 시행에 맞서 러시아가 지정한 `비우호국`에는 미국, 영국, 27개 유럽연합(EU) 회원국 등이 포함된다. 우리나라도 러시아의 비우호국으로 지정돼 있다.
러시아 가스에 대한 의존도가 가장 높은 독일의 올라프 숄츠 총리는 "앞으로도 유로화나 달러화로 계속 결제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독일 가스 수입량의 55는 러시아산이었다.
숄츠 총리는 이같은 방침을 최근 푸틴 대통령과 통화에서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로베르트 하벡 독일 경제장관은 이날 프랑스 재무장관과 공동기자회견에서 유럽국가들에 러시아 가스대금을 루블화로 결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계약위반으로, 이런 계책은 협박이라고 지적했다.
하벡 장관은 "계약은 존중돼야 한다"라며 "우리는 푸틴 대통령에 의해 협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가스 수입의 40를 러시아에 의존한 이탈리아의 마리오 드라기 총리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고는 지불 통화를 바꾸기 어렵다"며 루블화 지급 요구에 선을 그었다.
그는 가스 공급을 중단할 수 있다는 푸틴 대통령의 위협에 대해선 "유럽이 위험에 처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달러·유로화를 루블로 전환하는 것은 러시아의 내부 문제"라고 덧붙였다.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장관도 기자회견에서 "계약은 계약"이라며 루블화 결제 요구가 기존 계약 위반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푸틴 대통령의 조치에 대해 유럽 국가들이 러시아에 가한 경제 제재를 스스로 어기도록 유도하고, 루블화의 가치를 떠받치기 위한 노림수라는 분석이 나온다.
코넬 대학의 에스와르 프라사드 이코노미스트는 뉴욕타임스(NYT)에 "푸틴은 제멋대로 계약의 조건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국 가스에 의존하는 국가들도 입맛에 맞게 행동하도록 압박하기로 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가스 중단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조기 경보를 발령했다. 이는 루블화 결제 거부로 인해 갑자기 러시아 가스 공급이 중단되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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