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재선성공으로 종신집권 길 열었다

입력 2023-05-29 05:32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 28일(현지시간) 결선 투표까지 가는 치열한 접전 끝에 대선에서 승리해 재선에 성공했다.

선거 전만 해도 이번에야말로 20년 집권에 마침표를 찍는 것 아니냐는 예상이 나왔지만 집권기간 숱한 고비를 넘긴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도전도 이겨내며 자신이 왜 '21세기 술탄'으로 불리는지 증명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재선으로 2003년 첫 집권 이후 2033년까지 최장 30년에 달하는 사실상의 종신집권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을 바란 러시아는 안도하게 됐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내 이단아에 골치를 앓아온 미국과 서방은 앞으로도 튀르키예와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야 할 형편이다.

튀르키예의 권위주의 체제와 비정통적 경제정책도 계속 유지될 예정으로, 민주주의 후퇴와 경제난 등 산적한 국내 문제 해결이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 "'튀르키예 세기' 시작…아무도 우리 국익 탐내지 못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결선투표 개표가 막바지에 달한 이날 오후 8시15분께 이스탄불 거처 앞에서 지지자들을 상대로 "앞으로 5년간 튀르키예를 통치할 책임을 다시 맡겨준 모든 국민에게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러분의 의지는 투표함에서 튀르키예의 굽히지 않는 불변의 힘이 됐다"며 "신의 뜻에 따라 여러분의 믿음에 보답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튀르키예가 오늘 유일한 승자"라며 "8천500만 국민 모두가 승리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이번 승리로 '튀르키예 세기'의 문이 열렸다"면서 "이번 선거 결과는 아무도 튀르키예의 이익을 탐낼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고 강조했다.

같은 시간 국영 TRT 방송과 a뉴스 등 방송들도 일제히 에르도안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투표 종료 직후부터 에르도안 대통령의 거처에 모여든 수천 명의 지지자들은 국기를 흔들며 환호했고, 에르도안 대통령은 노래를 부르며 분위기를 달궜다.

이스탄불 시내에서도 지지자들이 차량 경적을 요란하게 울리며 에르도안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했다.

관영 아나돌루 통신에 따르면 오후 8시 55분 현재 투표함 99%가 개표된 가운데 에르도안 대통령은 52.08%를 득표해 47.92%를 얻은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에 앞서고 있다.

개표 후반까지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앞서고 있다고 보도한 친야 성향의 앙카 통신도 개표율이 90%를 넘어가면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역전했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언론사별로 투표소에 배치한 직원이 현장에서 확인한 자료를 토대로 한 비공식 개표 결과라고 AP는 설명했다.

비슷한 시간 튀르키예 선거관리위원회인 최고선거위원회(YSK)는 투표함 75.42%가 개표된 상황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53.41%를,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46.59%를 각각 득표했다고 밝혔다.

2018년 취임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번 승리가 확정될 경우 2028년까지 추가로 5년간 집권하게 된다.

중임 대통령이 임기 중 조기 대선을 실시해 당선되면 추가 5년 재임 가능한 헌법에 따라 2033년까지도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 경우 2003년 총리로 시작된 그의 집권 기간은 30년까지로 연장된다.

◇ 에르도안, 경제난·대지진 절체절명 위기 속 예상 깨고 승리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번 대선 승리는 선거 직전 예상을 뒤집은 결과다.

이번 대선은 지난해 10월 기준 전년 대비 85%가 넘는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리라화 가치 폭락 등으로 경제가 파탄 직전인 상황에서 치러졌다.

게다가 지난 2월에는 21세기 최악의 재난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진이 발생했고, 이에 대한 정부의 부실 대응과 부패 문제가 정권 심판론으로 이어졌다.

선거 때마다 사분오열했던 야당도 이번에는 6개 당이 반(反)에르도안을 기치로 단일후보를 내세웠다.

에르도안 대통령 치하에서 탄압받아온 쿠르드족이나 이번에 처음으로 투표하는 500만 명에 달하는 유권자의 표심 역시 야당을 선택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정권교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실제 선거 직전 여론조사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지율은 40%대 초반에 머문 반면, 6개 야당 단일 후보인 공화인민당(CHP) 케말 클르츠다로을루 대표의 지지율은 40% 후반에서 50%를 넘나들었다. 일각에서는 클르츠다로을루 대표가 1차 투표에서 과반 득표로 당선을 확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그러나 뚜껑을 열자 결과는 정반대로 나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차 투표에서 아깝게 과반에 미달한 49.52%의 득표율로 44.88%의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를 따돌렸다.

여기에 1차 투표에서 5.17%를 득표해 3위를 차지한 승리당 시난 오안 대표가 에르도안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결선투표를 앞둔 에르도안 대통령이 승기를 휘어잡았다. 1차 투표와 함께 실시된 총선에서 집권당인 정의개발당(AKP) 연합이 600석 중 323석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한 것도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 가도를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난민 전면 송환을 포함한 강경한 민족주의 캠페인으로 전략을 수정했으나, 예상외의 1차 투표 패배에 지지층의 사기는 이미 꺾인 뒤였고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쏠린 보수 민족주의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에도 역부족이었다.

클르츠다로을루 대표는 이번 개표 결과에 대해 "이번 선거는 최근 수년간 가장 불공평한 선거 중 하나였다"면서도 "권위주의 정부를 바꾸려는 국민의 의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국가 앞에 기다리는 어려움들에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며 "나는 나의 투쟁을 계속하겠다. 여러분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계속해달라"고 당부했다.

◇ 튀르키예 권위주의 강화…팽창주의·반미친러 노선 유지 예상

이번 선거는 올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선거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튀르키예뿐만 아니라 중동과 유럽, 서방과 반서방의 국제질서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재선으로 튀르키예는 제왕적 대통령제 하의 권위주의 통치체제가 한층 강화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7년 개헌을 통해 부통령 및 법관 임명권, 의회 해산권, 국가비상사태 선포권까지 막강한 권한을 확보했으며, 이를 통해 행정부와 사법부, 입법부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했다. 나아가 대대적 숙청과 규제 작업을 통해 언론과 사회 전 분야까지 장악했다.

이렇게 다져온 통치 기반의 위력이 이번 대선에서 확인된 만큼 에르도안 대통령은 현재 체제를 유지하며 30년 초장기 집권을 본격 준비할 것으로 예상된다.

건국이념으로서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 세속주의가 퇴색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속적으로 강화해온 이슬람주의가 전면화할 수 있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초고물가와 경제난을 초래한 저금리 정책과 중앙은행에 대한 개입 등 비정통적 경제정책도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인터뷰에서 "선거 이후 내 말을 확인해보라. 금리와 함께 물가가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기존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강력한 튀르키예를 목표로 한 지역 패권 추구 외교 노선과 함께, 친러시아 노선 및 서방과의 불편한 관계도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으로선 나토 내에서 튀르키예의 독자 노선에 따라 난처한 입장이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반면, 러시아로선 튀르키예와 경제협력을 지속하면서 서방의 제재 충격을 완화하는 등 숨통이 트이게 됐다.

한편으론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번 재선을 계기로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냈다고 크렘린궁이 밝혔다.

푸틴 대통령은 "이번 승리는 튀르키예 수반으로서 사심 없는 노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며 "에르도안 대통령의 독립적 외교 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라고 평가했다.

또한 "우리는 양국 우호 관계 증진에 기여한 에르도안 대통령의 개인적 기여를 높이 평가한다"며 "현안에 대한 건설적 대화를 계속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고 크렘린궁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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