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국제금융시장은 주요국 중앙은행이 피벗(pivot·통화정책 기조 변화)을 추진한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피벗을 추진하자마자 ‘실수론’과 ‘실기론’이 동시에 거론되면서 중앙은행 무용론까지 일고 있다. 전자는 피벗을 추진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다는 의미로, 후자는 추진 방향은 맞았지만 ‘선제성(preemptive)’을 잃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미국 중앙은행(Fed)은 빅컷을 단행한 지 한 달도 채 못 되는 때부터 ’파월의 실수(Powell’s failure)‘에 시달리고 있다. 빅컷 추진 이후 발표되는 경제지표가 워낙 좋게 나오기 때문이다. 지난달 말에 발표된 3분기 성장률이 2.8%에 달했다. 오쿤의 법칙상 GDP 갭을 구해보면 여전히 1% 포인트 이상 인플레이션 갭이 발생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각종 물가 지표는 여전히 목표치를 웃돌고 있다. 오히려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4%로 8월의 2.3%보다 높게 나왔다. ’노랜딩‘이란 용어가 나올 만큼 펀더멘털이 강한 여건에서 빅컷을 단행하면 1980년대 초 당시 Fed 의장이 저지른 ’볼커의 실수(Volker’s failure)‘를 저지르지 않겠느냐는 비판이 통화론자를 중심으로 제기하고 있다.
2022년 3월 금리 인상 때도 Fed는 거센 실기론에 시달렸다. 2021년 4월 이후 모든 물가가 급등하자 ’일시적‘이라 판단하고 오히려 평균물가목표제(AIT·average inflation targeting)를 도입해 방관했다. 그 후 말이 뛰는 식으로 물가가 오르는 켈로핑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빅스텝(0.25%p), 자이언트 스텝 (0.75%p)으로 금리를 올리는 과정에서 경제 주체에게 충격과 부담을 줬다.
<그림 1> 미국의 각종 인플레이션 지표 추이
지난 6월 이후 세 차례 금리를 내려온 유럽중앙은행(ECB)에 대해 실기론이 핵심 유로국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이 1.8%로 목표치 2%를 밑돌았다. 하지만 유로의 맹주 격인 독일 경제는 지난해 -0.3% 성장한 데 이어 올해도 -0.2%로 예상돼 역성장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또 하나의 유로 핵심국인 프랑스 경제도 녹록치 못하다.
ECB의 실기론을 제기하는 핵심 유로국의 논리는 이렇다. 준스테그플레이션에 해당하는 지금의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6월부터 추진했던 피벗 시기를 더 앞당겼어야 했다고 반박한다. 실기를 했다면 10월 ECB 회의에서라도 베이비컷보다 빅컷을 단행했어야 한다는 시각이다. 유로 경제 앞날에 대한 시각도 낙관적이라고 비판한다.
핵심 유로국의 불만은 유로 앞날과 유로화 가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변수다. 8년 전 영국의 유럽통합(EU) 탈퇴에 이어 ‘넥스트(Nexit=Netherlands+Exit)’가 우려될 정도로 유로 내에서도 균열 조짐을 일고 있다. 달러인덱스 구성 통화 중 유로화 비중이 58%인 점을 고려하면 유로 균열로 유로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강달러 시대가 전개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 3분기 성장률이 낮게 나온 것을 놓고 우리 내부보다 밖에서 보는 시각이 부정적이다. 3분기가 다 돼가는 때에 한국은행이 내놓은 전망치 0.5%를 고사하고 한국경제신문이 내놓은 ‘제로(0)’ 수준에 가까운 0.1%로 나왔다. 한은의 예측 모델이 노후화됐다는 비판보다 일본 경제처럼 ‘선진국 함정(HIT·high income trap)’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는 우려가 눈에 들어온다.
한은이 앞으로 성장률이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는 시각에 대해 결론부터 말한다면 쉽지 않아 보인다. 경기순환 상으로 작년 3분기 이후 분기별 성장률을 보면 ‘불황의 늪(+0.8%→+0.5%→+1.3%→-0.2%→+0.1%)’에 빠져 경기 저점이 더 깊어지고 있다. 늪에서 허우적거리면 더 깊은 곳으로 빠지듯 복원력(resilence)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총수요 항목별 소득 기여도(Y=C+I+G+(X-M), Y:국민소득, C:민간 소비, I:설비투자, G:정부 지출, X-M:순수출)에서는 최대 항목인 민간 소비 부진은 래고 랜드 사태 이후 2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3분기 내내 원·달러 환율이 1300원 이상 높은 수준이 지속됐음에도 순수출 기여도가 마이너스로 떨어진 점도 우려된다.
현재 우리 경제가 갖고 있는 성장 장애요인을 단순생산함수(Y=f(L,K,A), L=노동, K=자본, A=총요소생산성)로 살펴보면 노동 섹터는 인구절벽과 저출산·고령화로, 자본 섹터는 토빈 q 비율이 ‘1’ 밑으로 떨어져 자본생산성이 낮다. 총요소생산성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각종 갈등, 부패 등으로 좀처럼 제고되지 못하고 있다.
국민경제 3면 등가 법칙(생산=분배=지출)상 곳곳에 내재해 있는 ‘병목’ 현상도 심각하다. 생산과 분배 간에는 알버트 허쉬만 교수의 전후방 연관효과가 떨어져 계층 간 소득 불균형이 더 심화되는 추세다. 분배와 지출 간에는 미래에 불확실해 구매와 투자를 꺼리는 ‘바이브세션(vibecession) 현상으로 성장률을 끌어내리고 있다.
우리 경제처럼 저량(stock)과 유량(flow) 변수에 성장 장애요인을 동시에 갖고 있을 때는 통화와 재정정책은 ‘긴축’보다 ‘부양’에 우선순위를 둬 후자부터 활기를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특히 통화정책이 그렇게 해야 한다. 전자는 우리 경제가 갖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결부돼 있어 단기 정책 요인에 쉽게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은이 피벗을 가장 늦게 추진하면서 그 폭도 베이비컷에 그친 것이 굳이 ‘실기론’이라 비판하지 않더라도 아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지난 1분기 성장률이 1.3%로 이례적으로 높게 나온 데에 따른 낙관적인 착시 현상에 걸렸거나 1선 목표인 물가안정 이외 다른 목표를 함께 고려하다 피벗 시기를 놓친 것으로 판단된다.
한은이 시끄러워야 한다는 것은 미국 중앙은행(Fed)과는 분명히 차이가 난다. Fed가 시끄러운 것은 양대 책무(물가안정과 고용 창출)와 관련해 시장 참여자 간에 갭을 줄이기 위한 차원에만 한정된다. ‘시장친화적’ 노력에도 지난 9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회의에서 빅컷을 단행했는데도 국채금리가 급등하는 수수께끼 현상이 발생한다. 다른 목표까지 간섭해 시끄럽다 보면 시장은 안정시켜야 할 한은이 더 혼란스럽게 할 확률이 높다.
Fed의 실수론, ECB와 BOK의 실기론은 통화정책 전환기에 중앙은행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트릴레마 국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조세와 복지, 그리고 국가채무 간 상충관계인 재정 트릴레마에 빗된 통화 트릴레마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금리를 내리면 물가가 오르고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경기가 침체되는 현상을 말한다.
각국 중앙은행이 트릴레마를 헤쳐 나가는 과정은 ‘해로드-도마의 칼날 성장 이론’에 비유된다. 작두를 타는 무속인이 칼날 위에서 떨어지면 큰 상처가 나듯이 물가를 다 잡기 전에 금리를 성급하게 내리면 ‘볼커의 실수’, 경기가 다 회복되기 전에 금리를 성급하게 올리면 ‘에클스의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트릴레마 국면처럼 통화정책 목표 간 상충될 때는 ‘틴버겐 정리(Tinbergen’s theorem·정책목표 수대로 정책 수단을 가져가는 것)대로 중앙은행은 1선 목표인 물가안정에 우선순위를 두고 다른 목표는 해당 부처에게 맡기면 된다. 한은처럼 경기, 물가, 고용, 가계부채, 강남 집값, 심지어는 교육 문제까지 고려하다 보면 어느 하나 못 잡는 상황에 닥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 한국경제TV 해설위원 겸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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