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 때 취로사업, 주민에 일자리 제공…소작인 빚도 탕감
(진주=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 경남 진주의 '용호정원(龍湖庭園)'은 한 부자가 기근에 시달리는 주민들의 생계를 돕기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조성한 인공정원이다.
오늘날 정부에서 실직자나 빈민구제를 위해 시행하는 공공근로나 취로 사업과 같은 개념으로, 이미 90여 년 전에 한 개인이 공적 성격의 사업을 벌인 것이다. 이 부자는 소작인들의 채권장부를 불살라 빚까지 탕감해 줬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만, 나라를 빼앗긴 일제 치하에서 한 사람의 결단이 지역 주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구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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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측은지심' 발동한 구휼사업으로 만든 정원
용호정원은 진주시 명석면 용산리 진주-산청 국도 3호선 변 조비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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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원은 1928년 밀양 박씨 문중의 박헌경(朴憲慶 1872~1937) 참봉(參奉)이 만들었다.
박 참봉은 조선 세조 때 단종 복위를 꾀하다 자결한 충정공(忠貞公) 박심문(朴審問)의 18대손이다.
당시 진주 지역에는 수년간 거듭된 수해와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이 무렵 조비마을도 많은 비로 개천 둑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물바다가 됐고, 40여 가구 중 24가구가 물에 떠내려가고 4명은 물에 빠져 숨지는 참사가 났다.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조비마을뿐 아니라 인근 마을 주민들도 식량이 없어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박 참봉은 굶주리는 주민을 도울 방법을 고민하다 구휼사업을 벌이기로 했다.
조비마을 앞 논과 밭에 공원 조성공사를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참여하는 주민들에게 하루 일당으로 돈과 쌀을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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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참봉의 후손 박우희(82·서예가) 씨는 "할아버지는 흙을 파고 지게에 담아 옮기도록 했는데, 흙 담긴 지게를 두 번 이상 짊어진 사람들에게 일당을 줬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일당이 얼마인지 알려지진 않았지만, 가족 3∼4명이 하루나 이틀 밥을 지어 먹을 만 했다는 말이 전해 온다"고 말했다.
용호정원 조성공사에는 하루 수십 명의 주민이 참여했고 마을 주민뿐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일당을 받으려는 행렬이 줄을 이었다고 박 씨는 덧붙였다.
조성공사가 2년여 만에 완공된 사실을 고려하면 참여한 연인원이 수만 명에 달하고, 풀린 돈도 가히 기하학적 규모로 추정된다.
이 공사는 1960∼70년대 취로 사업과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실직자 구제를 위한 공공근로 사업을 연상시킨다.
박 참봉의 나눔 실천에 감동한 사람들은 감사 표시로 용호정원 인근에 공덕비 7기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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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높은 덕은 자비와 사랑으로 공평하고 균등했네, 힘을 다하시어 조상을 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황금을 털어내 가난을 구휼했네, 흉년 배고픈 시절에 고달픈 사람들을 구제해 백성을 편케 했네…'
부(富)를 과시가 아닌 나눔의 수단으로 사용한 박 참봉을 주민들이 이렇게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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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참봉은 재산가…"곡물 사업 벌여 현금·토지 많았다"
박 참봉은 사재로 취로 사업을 벌일 만큼 많은 재산을 가진 사업가였다.
후손 박 씨는 "할아버지는 대대로 이어온 양반 집안으로 전답을 물려받았고 이곳에서 재배한 곡물을 파는 사업을 벌여 돈을 많이 벌었다"고 소개했다.
박 참봉은 조비마을 전답 대부분을 소유했으며 인근 진주 이현동 일부 땅까지 소유한 대지주였다.
그는 재배한 곡물을 인근 전남·전북 등지까지 나가 팔았고 이 덕분에 현금을 많이 보유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전 재산이 과연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수 없고 '만석꾼'으로 수만금을 가진 재산가란 말만 집안에 전해 온다고 박 씨는 밝혔다.
할아버지가 용호정원을 조성하기 전인 1927년 용산리 뒷산에 '용산사'란 절을 세웠다고 박 씨는 귀띔했다.
그때도 가뭄 등으로 하루하루 생계를 걱정하는 주민들을 돕기 위해 절을 지었는데 기근이 계속되자 용호정원도 건설했다는 것이다.
그가 공사를 벌여 일자리를 만들고 돈과 식량을 나눠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박 참봉은 이재민들에게 땅을 나눠 줘 집을 짓게 하고 소작인들로부터 받은 토지세를 돌려줬다.
특히 부채를 탕감해 주려고 채권장부를 불태워 없앤 것으로 유명하다.
박 씨는 "할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이웃 주민들에게 많은 곡식과 돈을 빌려줬는데 이를 적은 게 채권장부였다"고 했다.
이렇듯 나눔을 실천한 박 참봉은 효행으로 성균관으로부터 포장(褒狀)을 받기도 했다.
박 참봉 할머니인 안동 장씨가 봄과 가을에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쌀 한 되씩을 나누어 준 사실도 전해 온다.
박 참봉이 어린 시절 할머니의 나눔 실천 모습을 보며 가슴 깊이 나눔 정신이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인다.
◇ 중국 명산 무산십이봉 본떠 만든 '절경'
박 참봉은 중국 쓰촨(四川)성 동쪽 명산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떠 용호정원을 만들었다. 총면적이 4천679㎡에 달한다.
당시 용호정(팔각정)을 먼저 만든 뒤 연지(蓮池)를 팠고 파낸 흙으로 12개의 가산(假山)과 둑을 쌓았다.
용호정(龍湖亭) 지붕에는 일제 탄압을 의식하지 않고 과감하게 태극문양을 새긴 기와를 얹었다.
후손 박 씨는 "당시 할아버지는 구휼과 함께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 용호정원을 지었다고 전해 온다"라며 "평생을 남을 위해 사신 분이다"고 말했다.
용호정원은 1990년 12월 20일 '경남도 문화재자료 제176호'로 지정됐다.
이곳은 또 지역 시인 묵객들의 시회(詩會) 연회장으로 이용됐다.
시인 묵객들이 무산십이봉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시문이 12기 비석과 사각 석주에 새겨졌다.
shchi@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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