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오랜 세월에 대한 소감을 어떻게 단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어요"
(부산=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30년 전 요절한 막내아들은 구순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다.
1987년 1월 대학생들은 이제 사회인이 돼 각자의 길을 가고 있지만,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아들의 빈자리는 그대로다.
부산 수영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정기(89) 씨는 "아,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라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오는 14일은 아들을 가슴에 묻은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던 아버지는 영원히 마지막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막내아들과의 작별 인사가 늘 마음에 걸렸다.
부산시청 수도국 공무원이던 박 씨는 1987년 1월 12일 시청 당직실에서 바둑을 두다 서울로 간다며 인사온 아들에게 "그래라"는 말만 남겼다.
2남 1녀 중 막내였던 박 열사는 공부 잘하고 착한 아들이었다.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를 집에서 꺼내 보이며 형과 누나 앞에서 자랑하던 막내아들의 웃음과 목소리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막내아들은 다른 사람을 늘 배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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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는 그런 아들 생각에 매년 이맘때면 아내와 밤잠을 설친다.
일본어 강의를 듣기 위해 서울로 간다던 막내아들은 상경 이틀 뒤 남영동 대공수사2단 9호실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숨졌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이었다.
온 가족이 평소처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관할 영도경찰서장이 갑자기 찾아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아들이 숨졌다는 비보를 전한 것이다.
박 씨는 당시 "뭐라 할 말이 없었어요"라고 회상했다.
그러곤 찻잔만 물끄러미 바라봤다.
먼저 간 막내아들의 유골을 임진강 지류에 뿌리고 일상으로 돌아와 적응하려 했지만, 빈자리는 컸다.
고문 사실을 최초 보도한 기자, 양심선언을 한 의사, 모교인 혜광고와 서울대 동문 등 수많은 사람이 함께해도 막내아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은 늘 허전함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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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열사 30주기를 맞는 소감을 묻자 박 씨는 "그 오랜 세월에 대한 소감을 어떻게 단 몇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어요"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비록 잘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우리 막내아들은 조금도 모자람 없이 완벽한 아들이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박 씨는 공무원 생활을 마친 뒤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어 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이사장과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제는 지팡이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건강이 예전 같지 않지만, 오는 14일 막내아들을 추모하는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다.
pitbull@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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