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현 제주대 석좌교수 "일본 어부들 남획에 비운의 멸종”
(서울=연합뉴스) 임형두 기자 = 수수만년 그곳을 보금자리 삼아 살아가던 생명체가 있었다. 이들에게 그 섬은 세상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낙원이었다. 해식동굴은 편안한 보금자리였고, 바다에는 천혜의 자원이 풍요롭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오랜 평화는 순식간에 깨져버렸다. 몰려든 약탈자들은 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였다. 그리고 살과 기름과 가죽을 탐욕의 도구로 능욕하듯 마구 써먹었다. 무차별적 대량학살에 개체 수는 하루가 다르게 격감했고, 결국 멸종이라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그 이름은 ‘독도 강치’(국제공인 학명 ‘일본강치’)다. 바다사자의 일종인 독도 강치는 집단 사냥 100년도 안 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기억에서 아득히 멀어져갔다. 이들의 보금자리는 침탈자인 인간의 차지가 됐고, 이들 인간은 그 소유권을 놓고 갑론을박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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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강치에게 헌정하는 멸종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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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치야 독도야 동해바다야 / 사라져 간 강치를 기념하여 비를 세우노니 / 우리 바다 영토 지킴이가 되어주소서’
독도의 한쪽에 세워진 ‘독도 강치’ 기념비에는 강치를 향한 안타까운 추도의 외침이 속 깊이 새겨져 있다. 기념 비문 바로 옆에는 사라져버린 독도 강치들이 부조작품으로 재현됐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2015년 8월 7일 제막했던 강치 기념비. 참가자들은 이를 계기로 독도 해양 생태계 복원을 간절히 염원했다.
“멸종된 강치가 되돌아오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비극적으로 죽어간 강치의 염원은 ‘평화의 바다, 생명의 바다’일 거로 의심하지 않아요. 이 해양 포유동물이 우리에게 남겨준 화두를 이어가는 일, 그 진정성이야말로 유일한 에피타프(묘비명)입니다.”
국내의 대표적 해양문명사가인 주강현(62) 제주대 석좌교수. 독도강치기념비의 비문을 손수 짓고 썼던 주 교수는 독도 현지에서 열린 기념비 건립 제막식의 참가 소감과 감회를 이같이 밝혔다. 그는 독도 강치의 연대기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독도강치 멸종사’(서해문집)를 최근 펴내 주목받았다.
‘독도강치 멸종사’는 독도의 본래 주인이었던 강치에 초점을 맞춰 섬의 생태와 역사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 주 교수는 2005년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 2008년 ‘독도 견문록’ 등의 저서에서 강치의 비애를 잠시 더듬기도 했으나 강치를 주인공으로 그 비극의 역사를 본격 탐색한 것은 이번 책이 사실상 처음이다. 2006년 출간된 주 교수의 ‘독도야 강치야 동해바다야’는 강치가 안내인이 돼 독도를 설명한 아동용 도서였다.
주 교수는 “독도의 주인은 누구일까? 일본일까, 한국일까?”라는 물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면서 본디 주인은 이 섬에 살던 강치라는 해양 포유동물이었다고 역설한다. 환동해 복판에 솟아 있는 화산섬이라는 생태환경적 특수조건에서 집단서식하게 된 강치는 누대의 역사를 평화로이 살아왔으나 에도(江戶)시대 이래로 일본인들에 의해 그물에 갇히고 총칼로 죽임을 당하면서 비운의 종말을 맞았다.
“적어도 수만 마리 이상 살아가던 환동해 최대의 강치 서식지에서 피비린내 나는 집단학살극이 벌어졌지요. 가죽이 벗겨지고 기름이 짜내어져 일본 본토로 실려 간 겁니다. 도대체 얼마만큼의 강치가 집단학살됐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독도는 이 바다사자가 최후를 맞이했던 섬인데, 어느 누구도 그 최후를 지켜본 이가 없었어요. 기록으로, 구전으로 ‘강치의 낙원'이던 그곳 풍경만이 전해올 뿐입니다.”
강치는 울릉도와 독도를 비롯한 한반도 동해와 일본열도의 해안, 쿠릴열도, 캄차카 반도에서 주로 서식했다. 조선은 물론 일본에서도 에도시대까지는 이 바다사자의 수렵이 금지됐으나 메이지(明治)시대의 혼란기를 겪으면서 강치 포획이 본격화한다. 독도강치로서는 평화의 시대가 끝나고 수난과 종말의 시대가 참담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
주 교수는 “독도강치의 멸절(滅絶)은 일본에 일차적 책임이 있지만 그네들에게만 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라면서 “한국 역시 ‘국가주의' 입장에서 독도를 영유권 문제로만 접근할 뿐, 강치 멸종에 이르는 심각한 궤적에는 관심이 없거나 덜하다”고 안타까워한다. 환경운동가조차도 독도강치의 생태사적 범죄에 관해서는 발언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생태사관으로 독도 문제의 시각 전환을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번 책에서 강치와 강치잡이, 나아가 강치 멸종이 지니는 환동해의 문명사적 의미를 강조한 이유는 독도 문제를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종 멸종이 불러일으킨 ‘생태사관의 역사적 과제’가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이에요. 독도의 주인공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강치를 비롯한 생물체라는 시각까지 용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평화의 바다'는 우선 그네들에게 부여된 천부적인 것이며, 한국인과 일본인의 문제는 후차적이라는 공통된 인식이 필요해요.”
이번 저서는 생태사관에 초점을 맞춰 독도와 강치를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인간 중심의 사관에서 생명 중시의 사관으로 인식의 지평을 넓힘으로써 왜곡된 실상과 역사를 바로잡고자 하는 것. 주 교수는 “이번 책은 독도의 본디 주인인 강치에게 헌정하는 멸종의 연대기이며, 인간이 배제하고 있는 그 본디 주인에 대한 뒤늦은 예의이자 ‘기억투쟁’이다”라고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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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탐욕에 잔혹하게 희생
20세기 들어 본격화한 일본의 독도강치 남획은 그 급속한 멸절을 초래한다. 자국 영해에서 강치의 씨를 말려오던 일본 어부들은 울릉도와 독도에 밀려들어 탐욕스럽게 강치들을 대량포획해간다. 그 결과 1900년대 초만 해도 매년 수만 마리씩 잡히던 강치였으나 1920년대에는 울릉도 강치가 종말을 고한 데 이어 1930년대에는 독도에서 겨우 수십 마리가 잡힐 만큼 급감했다. 이때를 고비로 독도강치는 사실상 멸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주 교수는 말한다. 이어 1940년대 초반에는 상업적 강치 사냥이 종료될 만큼 희귀종이 됐다.
일본이 독도의 자국령 편입에 혈안이 된 데는 이 같은 강치 사냥이 있었다. 강치잡이 수입이 매우 높은 데 현혹된 일본 어부들은 오키(隱岐) 주민들을 중심으로 너나없이 이 일대에 출몰해 닥치는 대로 강치를 잡아갔고, 일본 정부는 1905년 각의에서 독도를 시마네(島根) 현 오키 도사의 소관으로 일방적으로 포함시킨다. 이는 훗날 일본이 독도를 자국령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된다.
일본 어부들의 강치 사냥은 그야말로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자망(刺網)이라는 그물 어구로 대량 포획하는가 하면, 무자비한 총살과 박살로 삽시간에 끝장을 내버리기도 했다. 주 교수는 당시의 사냥 장면을 담은 사진자료들도 책에 실어 그 잔혹사를 생생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일본인들은 왜 이렇게 강치잡이에 혈안이 됐을까. 그들이 노린 것은 강치의 가죽과 기름과 살이었다. 벗겨진 강치가죽은 가방이나 모자챙 등 일상 소모품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됐다. 주 교수는 “사람의 손으로 양육되는 소의 가죽으로 충분히 가능할 트렁크를 마다하고, 강치 가죽을 벗겨 고작 가방 따위를 만드는 등 인간의 한심한 일상적 욕구를 위해 강치가 너무도 손쉽게 학살극으로 내몰렸다”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다. 주 교수는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과학과 기술 중심의 사고방식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자연 착취가 더욱 심해졌고, 생물은 이용 자원으로만 여겨졌다”며 “모피 동물의 남획, 북아메리카 들소 대량학살, 포경산업 등장 등에서 보듯이 강치의 운명도 땅과 자연이 노예화하면서 동물에 대한 상업적 공격이 증가했던 시대상과 궤를 같이한다”고 말한다.
독도강치의 최후는 실로 비극적이었다.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강치에 최후의 일타를 가한 것은 바로 미군의 폭격. 미군은 1948년 폭격기로 독도에 폭탄을 투하한 데 이어 1952년에도 폭격기를 띄워 폭탄을 떨어뜨렸다. 이에 앞서 1951년에는 미군 총사령부는 독도를 미군 해상폭격연습지로 지정한 바 있다. 주 교수는 두 사건이 독도 영유권 문제와 깊게 관련돼 있다고 본다.
일제의 대량 포획으로 생태계가 산산이 부서지고 미군 폭격으로 최후의 일격을 당했으나 1950년만 해도 수십 마리의 강치가 무리를 지어 헤엄치는 모습이 목격됐다. 하지만 생태적으로는 이미 불가역적 막판 지경에 내몰린 상태였다. 독도에서 물질하던 제주 해녀들에 의해 간간이 그 목격담이 전해지던 강치는 1975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내보인 두 마리를 끝으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독도강치 종 소멸, 생태사적 범죄이자 죄악”
주 교수는 “일본이 이른바 '다케시마(竹島) 영토론'의 근거로 에도와 메이지 시대의 독도강치잡이를 들고 있으나 생태사관에서 볼 때 독도 강치의 종 소멸은 생태사적 범죄이며 죄악으로 그 국제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질타한다. 시마네 현의 독도 편입이 강치잡이와 연관이 있는데, 세계 해양종 다양성의 보존 차원에서 일본은 독도에서 자행한 대량학살극에 어떤 답변과 반성문을 내놓을 것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국에도 해양영토 영유권 관점에만 머물지 말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해양 문제에 접근하자고 권한다.
이 책이 탄생하는 데는 방대한 사료와 현장 취재가 있었다. 해양문명사 등 관련서를 끊임없이 집필해온 주 교수는 시마네 현의 오키 제도에 20여 일 동안 체류하며 강치잡이 후손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관련 자료도 다수 확보했다.
“고카이의 구미 촌에 들렀을 때 강치잡이꾼의 계보를 잇는 야하타 가문의 후손을 만났지요. 그 후손이 대뜸 들고나와 소개한 게 녹슨 총이었어요. 독도에서 강치 사냥할 때 썼다는 겁니다. 구미 촌의 곳곳에는 강치잡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그들로선 당시의 추억이 오랜 역사적 유전자 같은 구전 전승체를 구성하며 이어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아직도 독도 어장에 관한 법적 권한을 구미 촌이 부여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주 교수는 심성사(心性史) 관점에서 한일 사이의 차이를 바라본다. 한국인에게 독도 후방의 ‘모섬'인 울릉도가 버티고 있듯이, 일본인은 ‘다케시마’가 오키에 딸려 있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아득한 전설로 사라져버린 독도강치. 이를 기억하게 하는 공간은 얼마나 있을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박제된 강치 흔적마저 찾기 어렵다. 부산 해양수산과학관에 독도강치와 유사한 바다사자의 박제 전시품이 있을 뿐이다. 울릉도의 강치 동상과 독도의 강치기념비, 서울 독도체험관의 강치 모형 정도랄까. 반면에 일본에는 오사카해양관 등 30여 곳에서 강치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주 교수는 해양문명에 좀 더 관심을 갖자고 제안한다. 예컨대 해양문명사의 경우 제주대를 빼고는 그 어느 대학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 제주를 가더라도 너나없이 비행기를 타려 할 뿐 배편으로 이동하는 건 쉽게 생각하지 못한다. 주 교수는 “인류문명은 해양문명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바다와 문명은 깊은 관계를 맺어왔다"며 “이는 글로벌 시대인 지금도 마찬가지다”고 강조한다.
서울 출신으로 경희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던 주 교수는 ‘조기에 관한 명상’‘우리문화 수수께기’‘등대문화사’‘환동해문명사’‘제주기행’‘독도견문록’‘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적도의 침묵; 해양문명 교차로’ 등 관련서를 지금까지 50여 권 출간했다. 올가을에는 ‘해양실크로드 대탐사’를 펴낸 데 이어 내년에는 한 월간지에 연재 중인 ‘세계 섬 문명사’를 책으로 엮을 예정이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2월호 [인터뷰]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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