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십] '의병 참여·백성 구휼' 만취당 김사원

입력 2017-01-12 07:07   수정 2017-01-12 08:55

[나눔의 리더십] '의병 참여·백성 구휼' 만취당 김사원

"나라 어려울 때 일어나고 나누는 삶 가르침 이어지도록 후손들 교육"





(의성=연합뉴스) 이강일 기자 = '의(義)로운 고장' 경북 의성군은 조선 말 항일 의병이 활약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중 점곡면 사촌리는 의성 의병 운동의 구심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등 국가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기념관, 기적비(紀績碑) 등 항일·항왜 항쟁 상징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어려운 이웃을 보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전통이 내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안동 김씨 만취당(晩翠堂)파도 있다.

'오랫동안 푸르다'라는 뜻인 만취당은 서애 류성룡 외사촌의 아들인 김사원(金士元·1539∼1601) 선생이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논어 구절의 속뜻에서 따와 지은 호이다.

이곳에는 김사원이 1582년(선조 12년) 자기 호를 따 이름 붙인 건물로 안동 김씨 만취당파 종중 재실인 만취당(보물 제1825호)이 있다. 퇴계 이황이 가장 아낀 제자로 알려진 김사원은 학문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만취당을 세웠다고 한다.

대과 급제자 3명만 나와도 '문벌'로 여긴 시대에 대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해 학문을 숭상하는 것으로 유명한 만취당 집안이다. 그러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책 대신 칼을 잡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사원은 동생들과 함께 나라 구하기에 나섰다.

병법이나 무술을 익힌 것은 아니었으나 양반으로서, 책 읽은 선비로서 의병으로 나서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봤다.

그는 의성 정제장(整齊將·보급 관련 업무를 맡음)에 추대됐다. 동생 독수헌(獨秀軒) 김사형(金士亨)과 후송재(後松齋) 김사정(金士貞)은 곽재우 장군을 따라 경남 창녕 화왕산성에서 창의(倡義·국난을 당해 나라를 위하여 의병을 일으킴)했다.

만취당은 의병 활동 외에 굶주린 백성을 돕는 데 힘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임진란을 전후해 흉년이 계속되자 집안 창고를 열었다. 수십 마지기 논밭이 재산의 전부였지만 아끼지 않았다.

선생이 실행한 구휼과 관련해서는 수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여성이나 걸인이 양식을 꾸러 오면 꼭 의관을 정제하고 도움을 줬다고 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가족 굶주림을 해결하러 온 이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라고 봤기 때문이다.

양식을 꾸러 온 사람에게 '차용증'을 쓰게 한 일화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양반이 봄에 백성에게 식량을 꿔준 뒤 제때 갚지 못하면 이를 빌미로 땅을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한 시대였으나 선생이 차용증을 받은 것은 곡식을 되돌려 받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가을 한 백성이 빌려 간 양식을 갚지 못하게 되자 토지문서를 가져와 이 문서로 대신 변제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김사원은 그 백성이 보는 앞에서 차용증을 곧바로 찢어서 태워버렸다.

그는 "차용증을 쓰게 한 것은 곡식을 갚는데 게으르지 말라는 뜻이지 논밭을 빼앗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며 "마음고생이 심했겠다"고 위로했다.

이에 근처 주민들은 만취당 종가 창고를 '김씨 의창(義倉·의로운 창고)'이라고 불렀다 한다.

만취당의 도움으로 굶주림을 면한 백성은 그 은혜에 감복해 형편이 나아지면 꼭 주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나눔을 실천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김사원은 '벼슬을 탐하지 말라'는 증조부 유훈과 '위기지학'(爲己之學·인격 수양을 위해 하는 학문)을 하라는 스승 퇴계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왜란이 끝난 뒤 조정은 그에게 의병활동과 굶주린 백성을 구제한 공을 인정해 '절충장군(정3품) 행 용양위 부호군(종4품)'(折衝將軍 行 龍陽衛 副護君)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전해진다.

후손들은 정묘호란, 영조 때 무신란(戊申亂), 조선 말 외세 침탈기 등 국가 위기 때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이 나자 만취당 후손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대장 운산(云山) 김상종(金象鍾), 소모장(召募將) 좌산(左山) 김수욱(金壽旭), 선봉장 김수담, 관향장 김수협 등 여러 후손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김수담·김수협 등이 전사하는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는 이런 의병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사촌마을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며칠 동안 계속된 불로 영남의 와해(瓦海)라고 할 정도로 기와집이 많던 사촌마을은 만취당을 빼고 대부분 피해를 봤다.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이곳에 현재 고택이 많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며 전통의 가치도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만취당 후손은 '무자기'(無自欺·스스로를 속이지 마라)를 가훈 삼아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베푸는 가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만취당 14세 종손 김희윤(67)씨는 "중학교 시절 사촌마을에 비가 많이 오면 개울 건넛마을에 살던 친구들은 하교할 수 없을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집에서 재우곤 했다"며 "지금 생각하니 종부였던 어머니도 '나눔과 베풂'이란 선조들의 가르침을 실천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선조 뜻을 받들어 나라가 어려울 때 일어나고 나누는 삶을 사는 것이 600년 넘게 지켜온 조상 음덕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는다"며 "후손에게도 이런 가르침이 이어지도록 교육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leek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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