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랑 실천한 선비…'큰 바위 얼굴' 같은 스승"
(서천=연합뉴스) 이은중 기자 = "내가 죽으면 비문에 '왔다, 사랑했다, 갔다'는 글귀만 새겨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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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청빈한 선비정신으로 사재를 털어 지역 인재 양성에 힘쓴 충남 서천의 큰 스승 청암(靑菴) 이하복(李夏馥·1911∼1987) 선생이 세상을 떠나기 전 후손들에게 남긴 말이다.
그는 77세 나이로 소천하기에 앞서 자신이 세운 서천 동강(東崗)중학교 운영을 당부하며 이같이 당부했다. 인간과 교육에 대한 사랑이 일생의 목표였고, 삶 자체였음을 보여준 대목이다.
서천군 기산면 동강중학교 윤병화 교무부장은 "처음 부임해 인사차 꿀 한 병을 들고 (청암을) 찾아갔더니 '학생을 잘 가르치면 학교에 이바지하는 것이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올 이유가 없다'고 꾸짖으셨다"며 "선생은 깨끗하고 강직하게 평생을 살다간 분으로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참 스승"이라고 회고했다.
동강중학교는 청암이 1949년 자신의 고향 기산면 진등재에 세운 학교다. 동생 은복씨와 함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논·밭을 팔아 고향 집에서 1.5㎞ 떨어진 곳에 학교를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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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이름 '동강(東崗)'은 할아버지 호 '동암(東菴)'과 아버지 호 '운강(雲崗)'에서 따왔다. 학교 재단의 기본 재산을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청암은 분신과도 같은 학교와 일상을 함께 했다.
그는 학교 기념관 안에 사무실이 있었으나 언제나 서무실의 작은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다. 때로는 도서관 한 귀퉁이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를 하며 말보다 행동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윤 교무부장은 "청암은 학교에서 별다른 직책을 맡지 않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매일 학교에 나와 항상 다정한 할아버지처럼 교정을 오갔다"며 "손수 책걸상을 고치고 잡초를 뽑으며 주변 환경정리 등을 맡아 하셨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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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학교'의 시작…뜻을 세우다
청암은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와 일본 와세다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전신) 교수 자리를 얻었다. 고등문관시험을 봐 관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실망과 질타 때문에 평소 아버지를 피해 다녔다고 그는 생전에 쓴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청암은 1939년 신학기부터 1944년 말까지 5년이 넘게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임하며 동양경제사를 강의했다.
이어 평소 품은 뜻에 따라 보성전문학교 교수직을 버리고 고향인 서천으로 낙향해 두 가지 일을 시작했다.
하나는 고향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벌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등공민학교를 열어 교육사업에 나선 것이다.
그는 농촌계몽운동의 하나로 동네 청년들을 모아 '근로 협동체'를 조직했다. 농한기에 가마니를 짜서 팔아 기금을 마련하고, 필요한 생필품을 사들여 분배했다.
교육사업은 고등공민학교부터 시작했다. 당시 고등공민학교는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제적 사정으로 정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비정규 교육기관'이었다.
청암의 경력으로 미뤄 정규 학교를 설립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음에도 가장 초보 형태의 교육부터 시작했다.
이현재 전 국무총리는 청암 자서전에 포함된 평전에서 '청암이 고등공민학교를 먼저 세운 것은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에 가진 못한 아이들을 시급하게 가르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 전 총리는 청암의 교육철학과 뜻을 기리기 위해 생가에 세운 청암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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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사랑 실천한 선비"…'큰 바위 얼굴'같은 스승
청암은 '인간사랑을 실천한 선비'였다고 이 전 총리는 평가한다.
이 전 총리에 따르면 초대 문교부장관 안호상 박사는 청암에게 "기왕 학교를 세우려면 서울에서 하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이에 청암은 "서울에는 나 말고도 학교를 세울 사람이 많다"며 "그 곳(고향)에는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고, 아이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돈이 없어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시골 아이들에 대한 청암의 사랑과 교육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교육사업을 위해 그는 거의 모든 것을 바쳤다.
명문 한산이씨(韓山李氏)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동생과 함께 2천섬을 수확하는 전답과 큰 집(이하복 생가, 중요민속자료 제197호)을 유산으로 받았다.
그러나 토지는 극히 일부인 3천여㎡를 제외하고 모두 학교 설립기금으로 출연했다. 커다란 집은 관리하는 사람에게 주고 정작 자신은 초라한 뒤채에서 방 하나만 사용하며 살았다.
중간에 화재로 소실된 학교를 재건하는 과정에서는 삶은 고구마 두어 개로 끼니를 때우기 일쑤였다고 관계자들은 전했다.
학교를 세운 그는 아무런 대가도 바라거나 탐하지 않았다.
청암이 떠난 동강중학교 어디에도 설립자 흉상이나 동상 하나 남아 있지 않고, 학교 이사장이나 교장 등 직책도 한 번 맡지 않았다.
그는 평생 권력과 재력을 멀리하고 근검과 절약, 박애정신을 행동으로 옮김으로써 지역의 정신적 어른으로 자리한 '큰 바위 얼굴' 같은 인물이었다고 지역 주민들은 평가했다.
정부는 청암 서거 7년 뒤인 1994년 '평생을 교육사업에 이바지하고 국가와 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국민훈장 동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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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손자인 청암문화재단 이세준(52) 이사장은 "조부는 사람과 고향, 전통을 매우 사랑하신 분"이라며 "교육에 대한 꿈을 세우고 실천하고 완성하신 참 스승"이라고 말했다.
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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