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일상적 후보 뒷조사에서 워싱턴 정가 폭탄 된 전말 소개
지난해 7월부터 소문 확산, 대선 후 "가장 지켜지지 않는 비밀 돼"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미국이 스탄(Stan)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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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경제학을 수상한 뉴욕타임스의 유명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이 지난 2일 자 칼럼에서 개탄한 말이다. 투르크메니스탄과 같이, 과거 소련에 속했다가 독립한, 나라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같은 현상이 미국에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이 지금 보이고 있고 또 앞으로 예상되는 행태와 우려되는 부패 조짐, 정실 인사, 법치 멸시 등이 '스탄' 국가들의 철권 통치자들의 그것들과 닮았다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동안 이들 나라를 우스워했지만, "이제 누가 웃을 수 있겠느냐"고 크루그먼은 자조했다.
그 6일 후 아랍권 위성채널 알자지라 방송의 웹사이트에선 캐나다에서 주로 활동하는 탐사전문 언론인 앤드루 미트로비카가 "미국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오래전에 이미 아메리카스탄이었다"고 비꼬았다.
트럼프 당선 이후부터이든 그 오래전부터이든, 취임을 불과 1주일 앞둔 트럼프 앞에 터진 미확인 정보문건 폭탄은 워싱턴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서 미국에 '스탄'의 이미지를 하나 더 추가함 셈이 됐다.
이번 사안은 트럼프에게 늘 따라붙는 '논란' 수준이 아니라, '위기'라고 뉴욕타임스는 11일(현지시간) 진단했다. 유례없이 말썽 많은 대통령 선거를 치른 터에, 이제 미국인들은 "막 취임하는 대통령에 관해 무엇을 믿어야 할지 분열되고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다. 미확인 정보문건에 든 내용의 진위가 이른 시일 내에 명명백백히 밝혀질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고 이 신문은 전망했다. 신뢰의 위기가 앞으로도 한참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지난 2015년 9월 트럼프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부유한 공화당 기부자가 워싱턴의 한 흥신소에 트럼프의 약점에 대한 뒷조사를 의뢰한 것으로 시작된, 어찌 보면 일상적인 선거의 그늘진 행위가 이렇게 큰 폭탄으로 터지기까지 과정을 뉴욕타임스는 추적, 소개했다.
우선 정보문건의 핵심 내용 2가지. 첫째는 러시아어로 '콤프로마트(kompromat)'라고 하는, 약점 자료를 수집하는 공작. 러시아는 수년에 걸친 공작 끝에 트럼프와 매춘부 간 성관계 동영상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모스크바 호텔에서 매춘부와 벌인 '도착적' 성관계에 대해 여러 미국 매체들은 구체적인 표현으로 전했지만,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같은 전통있는 정통 언론들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춘부와 함께 있는 테이프' 정도로 설명했다.
러시아는 트럼프에게 구미가 당길 사업 거래도 제안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이 이것으로 트럼프를 옭아매려 했다면 성공하지 못한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말했다. 트럼프는 러시아에 사업을 벌인 게 없다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목적은 트럼프를 직접적인 러시아 간첩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가 자연스럽게 러시아 측 지인들에게 정보를 제공토록 하는 데 있었을 것이라고 이 매체는 풀이했다.
문건의 2번째 내용은 러시아가 최근 대선 때 시작한 공작. 선거운동 기간에 트럼프 측과 일련의 접촉을 통해 민주당 측에 대한 해킹 문제를 논의했다. 특히 지난해 늦여름께는 체코 프라하에서 트럼프의 법률고문이던 마이클 코언과 러시아문화센터 관리가 만났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조사해 문건을 작성한 사람은 1990년대 초 모스크바에서 영국의 해외정보기관 MI6의 비밀요원으로 활동했던 크리스토퍼 스틸. 그는 이후 MI6 본부에서 러시아에 대한 최고 전문가로 근무하다 2009년 은퇴한 뒤 사설정보업체인 `오르비스 기업정보'를 차렸다.
현재 50대 초반인 그는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 동료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하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국제축구연맹(FIFA) 부패 조사에도 참여했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비밀요원으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직접 모스크바로 가진 못하고, 러시아인들을 고용해 현지 정보원들과 전화통화를 하거나 러시아 내 자신만의 조직과 비밀접촉을 통해 트럼프의 러시아 인맥을 조사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측이 역정보를 흘릴 수도 있다는 점을 스틸은 잘 알고 있었지만, 입수한 정보의 진위를 가리기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확인 가능한 것도 여전히 불확실한 면이 있다. 예컨대, 프라하 접촉에 대해 코언은 10일 트윗을 통해 결코 프라하에 간 일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했고, 러시아 측 인물도 이 매체와 전화통화에서 트럼프 측 인물과 만난 일이 없다고 부인했다. 트럼프와 관계없는 동명이인이었을 수 있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2015년 트럼프 약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던 익명의 공화당 기부자는 지난해 봄 트럼프가 사실상 공화당 후보로 입지를 굳히자 뒷조사 계약을 중단하고 말았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출신 글렌 심프슨이 운영하는 퓨전 GPS라는 이 흥신소는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예비후보의 지지자들과 새로 계약을 맺고 조사 활동을 이어갔다.
과거 언론 보도 내용, 소송 서류, 트럼프 사업 관련 자료 등을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드는 게 일이던 퓨전 GPS의 조사 활동은 지난해 6월 민주당 전국위원회(DNC)에 대한 러시아 측의 해킹 사실이 워싱턴 포스트에 보도된 것을 계기로 확 바뀐다. 트럼프의 러시아 커넥션에 대한 조사를 위해 심프슨이 스틸과 계약을 맺은 것이다.
두 사람의 지인들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옛 소련 정보기관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그의 협박, 매수공작 전술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공유했다.
스틸의 조사 활동은 대선이 끝난 후에도 최소한 12월까지는 계속됐다. 심프슨이든 스틸이든 돈도 받지 않은 일이었지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중단하지 않았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스틸의 문건에 대한 소문은 이미 지난해 7월부터 정치권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릭 윌슨이라는 한 공화당 운동원은 그 무렵 한 방송사 기자로부터 그 문건을 아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초가을엔 스틸의 문건 일부가 FBI와 일부 기자들에게 입수됐다. 당시 FBI는 자체적으로 이미 트럼프의 러시아 커넥션에 대해 조사중이었다.
스틸은 늦여름 또는 초가을쯤 영국 정보기관에도 이 문건을 넘겼다고 MI6의 한 관계자는 밝혔다. 이런 중요한 내용이 선거전 활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손에만 들어가선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선거가 끝난 후, 스틸이 여전히 계속 보강하고 있던 이들 문건은 "워싱턴에서 가장 지켜지지 않은 비밀"이 된 상태였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 기자들이 여기저기 확인 취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존 매케인(공화) 상원의원도 12월 애리조나대 매케인연구소에서 일하는 국무부 고위직 출신으로부터 이 문건을 입수해 제임스 코미 FBI 국장에게 넘겼다.
뉴욕타임스는 "워싱턴답지 않게, 서로 경쟁하는 언론사들의 많은 기자가 이 외설스럽고 저주스러운 문건을 갖고 있었음에도 보도하지 않았다"며 확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보도 자제가 이번 주 급선회했다. CIA 등 정보기관 수장들이 러시아의 미국 대선 사이버 공격에 대한 정보 보고서에 이 문건의 요약본을 첨부한 사실이 알려졌고, 그 요약본이 지난 10일 CNN 방송에 유출된 것을 계기로 언론 보도가 홍수를 이루게 됐다.
yd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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