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공장서 라면으로 끼니…외국인 노동자들 '외로운 설'

입력 2017-01-27 09:16  

텅 빈 공장서 라면으로 끼니…외국인 노동자들 '외로운 설'

불황에 '명절 떡값' 없고 추운 날씨에 서울 나들이도 포기

고국 친구들과 조촐한 술자리·가족 영상통화가 유일한 낙

(음성=연합뉴스) 공병설 기자 = "설 떡값 받는 친구들 보면 부럽죠. 스마트폰으로 가족과 영상 통화하는 걸로 명절 외로움을 달랩니다"






중부권 대표적인 산업단지가 자리 잡은 충북 음성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다. 가동 중인 업체가 1천600여 곳에 달하는데 등록된 외국인 노동자가 8천명 가까이 된다. 영세한 업체가 많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불법 고용한 외국인 노동자까지 합치면 실제는 1만명을 웃돌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없으면 공장이 올스톱 될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은 어엿한 이 지역 산업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처우는 열악하다. 흥겨운 분위기로 들썩거리는 설이 이들에게는 오히려 곤욕이다.

한국인 직원들이 모두 고향으로 떠나고 난 한겨울 공장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텅 빈 기숙사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으며 끼니를 때우고, 고국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 술 한잔 하면서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잠시나마 이역만리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랜다.

한국의 최대 명절인 설 연휴를 맞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만감이 교차한다.

고된 작업에서 며칠간 풀려날 수 있다는 해방감도 잠시, 갈 곳도 만날 사람도 없는 긴 연휴를 보내는 것 자체가 여간 큰일이 아니다.

지원 체계가 잘 갖춰진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가 열려 적적함을 덜 수 있지만 소규모 도시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딴 세상 얘기다.

충북 음성의 타일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스리랑카 출신 와루나 라크말 자야수리야(37) 씨는 "명절 연휴 때면 서울에 놀러 가곤 했는데 이번 설에는 그냥 집에 있기로 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강추위에 먼 거리를 이동하는 게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지방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는 명절이 되면 서울에 가서 쇼핑도 하고 고향 사람들도 만나는 게 큰 즐거움이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이들은 큰맘 먹고 저가항공 티켓이라도 끊어 고향에 다녀오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음성 같은 소도시의 외국인 노동자 타운은 활기에 찬 평소 주말과 달리 '명절 공동화 현상'도 일어난다.

하지만 한겨울에 찾아오는 설은 사정이 좀 다르다.

대부분 날씨가 따뜻한 동남아 국가 출신인 외국인 노동자들은 추석보다 훨씬 덜 움직인다. 요즘처럼 강한 한파가 몰아치면 더욱 움츠러든다. 감기라도 걸리면 생계에 큰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자야수리야 씨의 한국 생활은 두 번째다.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일하고 귀국했다가 아버지 치료비를 벌러 이듬해 다시 한국에 왔다.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덕에 일과 후나 휴일에 이런저런 봉사활동과 부업으로 시간을 보낸다.

음성경찰서 외국인 방범대원으로 활동하고 출입국관리사무소와 경찰에서 통역도 맡고 있다.

서울에 안 가는 이번 설에는 방범대 근무를 자청했다. 동료 외국인 노동자들이 명절 외로움을 떨쳐버리려다 술 마시고 운전대를 잡는 일을 막아야겠다는 생각에서다.

연휴 기간 지역에 있는 스리랑카 친구들도 만나 함께 고향 음식을 만들어 먹고 술도 한잔 할 생각이다. 간만에 노래방도 가기로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반가운 건 당연하지만, 이따금 서먹한 분위기도 빚어진다.

각자 다니는 회사 사정에 따라 복지와 근무 여건이 달라 함께 모이면 자연스럽게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 급여 수준도 차이 나는 데다 명절 상여금을 받고 못 받고에 따라 희비가 갈린다.

자야수리야 씨는 "이번 설에는 85% 정도는 떡값을 못 받는다고 들었다"며 "친구들끼리 모이면 상여금과 월급 얘기가 자연스럽게 화제에 오른다"고 했다.

2007∼2008년 설 상여금을 받았던 자야수리야 씨도 이번엔 떡값이 없다. 경기 불황을 절감한다.

그는 200만∼230만원쯤 되는 한 달 월급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150만원은 꼬박꼬박 고향 집에 부친다. 월세와 밥값에 전기세, 수도요금 등 각종 공과금을 제하고 나면 쓰는 돈이 거의 없는 셈이다.

자야수리야 씨는 "명절에 한국인 동료들이 설레는 표정으로 고향길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가족이 더욱 눈에 밟힌다"며 "영상통화로 얼굴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의 설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회사는 한국인 직원에게만 설 상여금을 주기도 한다. 용기를 내서 "사장님, 우린 왜 안 주세요?"라고 따져 물으면 "노동부에 신고하라"는 답이 돌아온다. 넘을 수 없는 커다란 벽이다.

한 외국인 노동자는 "최저임금만 받는 처지에서 뭐를 더 요구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어떨 때는 배 곯지 않고 아플 때 의료보험 적용을 받는 것만 해도 어디냐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음성경찰서 외사계 관계자는 "명절 상여금은 물론 선물세트 지급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를 차별하는 회사가 더러 있다"며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는 사측이 눈치를 보기 때문에 그나마 형편이 훨씬 낫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중소도시나 시골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은 대도시보다 여건이 더욱 열악하다"며 "처우 개선을 위해 지역 사회와 정부의 따뜻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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