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인 교황 vs 가톨릭 보수파 대리전으로 주목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몰타 기사단이 인공 피임을 금지하는 가톨릭 교리를 깨고 미얀마에서 콘돔을 배포한 책임을 물어 조직 고위 관계자를 해임한 사건을 둘러싼 교황청과 몰타 기사단의 갈등이 일단락됐다.
교황청은 25일 성명을 내고 "매튜 페스팅 몰타 기사단장이 24일 교황과의 알현에서 사의를 표명했고, 교황이 이를 받아들였다"고 밝혔다.
페스팅 단장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교황에게 반기를 든 장본인이다.
몰타 기사단은 조만간 최고위원회를 소집해 페스팅 단장을 대체할 새로운 단장을 선출하는 절차에 들어갈 예정이다.
교황청은 "새로운 지도자가 뽑힐 때까지 몰타 기사단을 이끌 대표를 교황이 곧 임명할 것"이라며 몰타 기사단을 사실상 교황청의 휘하에 둘 것임을 시사했다.
이로써 교황청과 몰타 기사단과의 약 2개월에 걸친 힘겨루기는 교황청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몰타 기사단장은 원칙적으로 종신직이지만 페스팅 단장은 교황에 항명했다는 가톨릭 교단의 곱지 않은 시선과 이번 논란이 가져올 부정적 이미지를 우려한 몰타 기사단 내부의 우려 등으로 사퇴 수순을 밟은 것으로 분석된다.
가톨릭 평신도 단체이자 주권 국가인 몰타 기사단은 이번 논란이 확산하며 몰타 기사단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자선 병원 등을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기부금 모금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걱정해왔다.
교황청과 몰타 기사단의 갈등은 몰타 기사단이 에이즈 방지 등의 목적으로 미얀마 빈민들에게 콘돔을 배포한 것을 문제삼으며 작년 12월 초 알브레히트 폰 뵈젤라거 부단장을 해임한 것의 적절성을 파악하기 위해 교황청이 명령한 조사에 페스팅 단장이 반발하며 표출됐다
교황청은 교황의 승인 아래 조사단을 꾸렸으나, 몰타 기사단은 교황청이 내정에 간섭한다고 반발하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아 항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페스팅 단장은 이 과정에서 몰타 기사단 고위 관계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교황청 조사위원회 위원들의 신뢰성을 문제삼으며 "교황이 임명한 위원회는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는 등 교황의 권위에 직접적으로 도전했다.
교황청은 이에 지난 17일 성명을 내고 몰타 기사단이 조사에 협조할 것을 촉구하며, 더 이상의 항명을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앞서 페스팅 몰타 기사단장은 폰 뵈젤라거 부단장을 지난 달 초 해임할 당시 교황청의 뜻이라며 사퇴를 종용했으나 폰 뵈젤라거 부단장은 해임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교황청에 사건을 보고했고, 이에 교황청이 폰 뵈젤라거 부단장의 해임에 관여한 적이 없다며 사건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표면적으로는 콘돔 배포와 연관된 해임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춰지는 이번 일은 교황으로 대표하는 가톨릭 진보 세력과 이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보수 세력의 대리전으로 인식되며 주목을 받아왔다.
몰타 기사단은 본래 가톨릭 교단의 전통과 서열을 중시하기로 유명하며, 특히 가톨릭 내에서도 대표적인 보수파인 미국 출신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이 몰타 기사단의 사제로 임명되고부터는 개혁 성향의 교황과 갈등을 키워왔다.
금욕과 절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성윤리와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중시하는 가톨릭 보수파들은 교조적인 도덕 우선주의보다는 자비에 기초해 개개인이 처한 상황을 판단할 것을 강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여러 차례 충돌했다.
콘돔 사용에 있어서도 가톨릭 진보 세력은 인류의 생명과 보건 증진에 기여한다면 특정 상황에서는 허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보수파는 가톨릭이 인위적 피임을 금한다는 점을 들어 어떤 경우에도 콘돔 사용이 금지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11세기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성지와 순례객들에게 의료 봉사를 제공하던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는 몰타 기사단은 교황에 순응을 서약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이자, 통치권을 행사하는 영토는 없으나 교황청을 포함해 세계 106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주권 국가라는 독특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회원은 약 1만3천 명을 두고 있으며, 약 10만 명의 직원과 자원봉사자가 세계 곳곳의 병원 등에서 구호 활동을 펼치고 있다.
ykhyun14@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