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김춘열씨 "정보화 정책에 울고 사교육 경감대책에 웃었어요"
"지금은 박달나무 수제주판 대신 플라스틱 치매예방용 인기"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제 아내의 소원이 '우리 식구 아닌 사람 없이 밥 한 끼 먹어봤으면'이라는데, 그 소원하나 못 들어 줬습니다."
주판 제작에 52년을 매달리느라 가족끼리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싶다는 아내의 단출한 소원도 못 들어줬다는 김춘열(67)씨.
그는 광주 북구 '운주주판' 대표로 수작업 나무 주판을 만들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제작자이다.
겉으로는 정치사와 아무 상관 없는 주판 장인으로만 보이지만 우리나라 정치사의 굴곡에 따라 주름진 이 장인의 인생사를 엿봤다.
◇ 정치사에 울고 웃는 '주판 장인' 인생사
그가 주산의 도구인 주판을 처음 손에 쥐어본 것은 16살이 되던 해인 1966년께다.
전남 나주시 봉황면 운곡리 고향에서 아버지가 농사조차 짓지 않아 주린 배를 붙잡고 집을 뛰쳐 나온 김씨는 목포 식당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설거지 일을 하다 서울까지 흘러갔다.
우연히 서울에서 구한 첫 직장이 주판 공장이었다.
당시 주판 공장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운영하다 남기고 간 시설이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기계·도구, 기술까지 남기고 간 공장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들어가 주판을 만들었다.
김씨는 그곳에서 주판제작의 일본인 스승을 만났다. 일본인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귀화해 남아 주판을 제작했다.
박달나무를 깎고 다듬어 주판알을 만들고, 손에 힘을 주며 구멍을 뚫어 알을 끼우는 방식으로 수제 주판 하나를 힘겹게 완성했다.
주산의 인기가 높아 주판은 불티나게 팔리던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들은 학교·학원에서 주판을 두드렸고, 상업고등학교의 필수 과목이기도 했다.
김씨의 어림잡음으로는 당시 전국에 한 달 평균 3만여개 주판이 팔려 나갔다.
주판 공장 사장들은 1년에 한 번에 하는 모임을 유명 요정 집에서 할 정도였다.
김씨는 왁자지껄한 요정 집을 술 취한 척 빠져나와 몰래 싸온 음식을 공장 직원들과 나눠 먹으며 악착같이 살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신문지에 돌돌 싸고, 결혼식도 못 올리고 함께 살던 부인에게 가짜 금반지 하나 손에 끼워주며 고향인 전남으로 내려왔다.
부인과 함께 산지 6∼7년 만에 고향으로 내려와 결혼식을 올렸다.
전남의 한 사찰로 신혼여행간 김씨 부부의 왼쪽 가슴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유고를 추모하는 검은 리본이 매달려 있었다. 1979년의 일이다.
1980년 신군부의 총부리가 광주시민을 겨누던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김씨는 고향인 나주에서 광주로 주판공장을 옮겨 운영했다.
주판을 직접 만들어 팔고, 주산교재까지 공급하며 김씨 사업은 나날이 번창하는 듯했다.
그러나 1994년께 김영삼 대통령이 체신부를 정보통신부로 개편하며 '정보화 정책'을 펴면서 주판은 계산기와 컴퓨터에 차례로 자리를 내줬다.
결국, 1997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운주주판'은 팔리지 않는 주판 제고를 쌓아둔 채 문을 닫았다.
재고로 남은 주판과 교재를 들고 사방팔방 뛰던 김씨를 살린 것은 바뀐 교육정책이었다.
2003∼2004년께 노무현 정부의 사교육 경감 대책의 하나로 일선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학교 교육이 활성화되면서 주판은 다시 주목받았다.
김씨는 지도자가 없어 주산 교육을 하지 못한 일선 학교에 지도자를 공급하고, 주판과 교재까지 납품하며 주산 교육을 부활시켰다.
이렇게 되살아난 주산 교육은 광주를 넘어 전국의 방과후 학교에 퍼졌다.
김씨가 주판을 납품하는 곳으로 추정하는 수치만 전국 80% 학교 이상이 주산 교육을 방과후 학교 등에서 실시하고 있다.
◇ 부활한 주판…수제 주판은 '역사 속으로'
"예전에는 박달나무가 귀해 주판알 한 가마니를 쌀 다섯 가마와도 안 바꾼다고 했습니다."
주산이 암산능력, 두뇌계발, 치매 예방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최근 주판의 판매량도 크게 늘었다.
운주주판 김씨는 속칭 '막 주판'이라고 불리는 합성수지로 만든 플라스틱 주판을 주로 만들며, 우리나라 수작업 생산 주판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주판알이 작아 어린아이와 노인들이 사용하기 불편한 점을 개선해 유아용, 치매 예방용 주판도 잇따라 개발해 특허도 여러 개 냈다.
모두 손수 나무를 깎아 나무 주판을 만든 노하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무 주판을 만드는 일은 수만 번의 손길과 정성이 필요한 일이다.
쉽게 깨져버리는 나무의 성질 탓에 박달나무로만 만드는 주판알은 나무를 주판알 모양으로 깎고, 정 중앙에 구멍을 뚫는 세심한 기술과 정성이 있어야 한다.
52년째 수제 주판의 만드는 김씨의 손은 그동안 저울이 됐고, 눈은 눈금자가 됐다.
나무로 만든 수제 주판은 주산대회에 출전하는 주산 숙달자에게는 꼭 필요하다.
플라스틱 주판은 자주 헛돌아 튕기지만, 나무 주판은 사람의 손때가 묻어 닳을수록 착착 손가락 끝에 감겨 계산의 정확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제 주판의 명맥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수지타산이 맞지 않고, 박달나무도 구하기 힘들어졌다.
박달나무로 틀을 짜고 주판알을 끼워 넣는 가장 고급형 수제 주판은 12만원이다.
김씨는 너무 비싼 가격에 찾는 사람이 많지 않자 틀을 흑단 나무로도 바꿔보고 주판의 크기를 줄여보며 수제 주판 가격을 인하하는 노력도 해봤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현재는 박달나무 주판알 10만개, 수제 주판 8천개 만들 재료만 남았다. 이를 다 소비하면 나무 주판은 우리나라에서 더는 생산할 수 없다.
백내장 수술을 받은 김씨의 눈도 발목을 잡는다.
2015년께 백내장 수술을 받은 김씨의 눈은 정밀한 작업을 하다 보면 안구가 앞으로 쏟아질 것 같은 고통을 안겨 언제까지 주판을 만들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수제 주판 제작 기술을 이을 후임자도 없어 김씨가 일손을 놓으면 우리나라는 기술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도 "주판과 함께한 인생이 행복했다"고 밝힌 김씨는 "금수저를 못 물고 태어났지만, 악착같이 자립하고자 살아온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며 웃었다.
김씨는 "주산은 계산기, 컴퓨터로 두드려 단순히 답을 얻는 것과 달리, 손끝으로 오는 몸의 감각을 머리에 차곡차곡 담는 행위다"고 말했다.
비록 정치사가 자신을 울고 웃게 했지만 올해 대선을 앞두고 정치인들에게는 "시민의 아픔을 손끝으로 만지고 머리로 계산하는 주판 같은 정치를 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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