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냉정과 열정 사이'·'반짝반짝 빛나는' 등으로 유명한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江國香織·53)의 소설 '벌거숭이들'이 번역돼 나왔다. 작가는 연애감정에 대한 차분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서사의 동력으로 삼은 작품을 많이 썼다. 이런 장기는 여전하지만 '벌거숭이들'에서 연애는 좀더 폭넓은 관계의 본질을 묻는 도구로 쓰인다.
소설은 미혼 치과의사 모모와 친구 히비키를 중심으로 두 사람과 관계맺는 인물들의 1년간 일상을 그린다. 히비키의 어머니 카즈에의 죽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특별히 극적인 사건 없이 등장인물 10여 명의 관점을 부지런히 오가며 이어진다.
모모는 카즈에가 세상을 떠날 즈음 결혼까지 염두에 뒀던 애인과 헤어지고 아홉 살 연하남 사바사키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한다. 신중하고 모범적인 성격의 모모는 새 애인에게 점점 의지하지만 사바사키의 연애에는 장난기마저 섞여있다.
모모가 안정적 직업에 젊은 남친을 두고 겉으로는 풍요로운 싱글 생활을 즐기는 반면, 히비키는 운송회사에 다니는 남편과 네 자녀로 이뤄진 대가족을 정신없이 꾸리는 전업주부다. 새 애인을 두고 모모를 수다스럽게 추궁하는 전형적인 아줌마 캐릭터. 히비키는 모모 커플을 초대해 저녁 자리를 마련한다. 사바사키는 처음 보는 자리에서 히비키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린다.
모모와 사바사키 ·히비키 세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은 엇갈린다. 이런 모순은 '골드 미스' 혹은 유부녀와 젊은 남자의 연애라는 통속적 관계, 인생사 심각할 것 없는 사바사키의 성격에 크게 의존한다. 그런 측면에서 카즈에의 동거남 야마구치는 작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숨겨진 주인공이다.
야마구치는 수십 년 함께 산 처자식을 버리고 카즈에와 동거에 들어갔지만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홀아비 신세가 된다. 두 사람은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사이였다. 처음에는 로잘리와 다카하시라는 닉네임으로 자신을 감췄다.
가족에게 쫓겨나다시피 하며 카즈에의 집으로 들어간 야마구치는 남겨진 집의 관리인 노릇을 하게 된다. 임차인이 집을 비울 때까지라는 조건이 달렸다. 야마구치는 카즈에 가족의 싸늘한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위층에 세들어 사는 젊은 여자와 차를 마시며 친구처럼 지내는가 하면 카즈에의 잠옷을 이불 속에 넣은 채 자기도 한다.
아내와 새 동거녀 둘을 한꺼번에 잃은 야마구치는 짧았던 두 번째 사랑을 마음에 새기고 일상을 살아간다. 사람들은 야마구치가 뻔뻔하고 우습고 결국은 처량해졌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그들도 언제든 야마구치가 될 수 있음을 깨닫지 못한다.
연애든 직장생활이든, 누구나 각자의 시선으로 관계를 규정하기 마련이다. 이리저리 엮이고 엇갈린 관계에 벌거숭이처럼 노출된 사람들, 내 눈에 비친 타인의 모습은 그 본질의 극히 일부일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작가는 상기시킨다.
소담출판사. 신유희 옮김. 336쪽. 1만3천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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