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이라고 강제로 자식을 없앤 한을 어떻게 풀 수 있나"
(고흥=연합뉴스) 여운창 기자 =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생각했는데 40년 전 한센인을 상대로 저지른 정부의 못된 짓에 대한 배상을 이제라도 받게 되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한센인 단종 낙태 조치에 대법원이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는 소식이 고흥 소록도에 전해진 15일 승소한 한센인 19명 중 1명인 A씨는 조용한 목소리로 소감을 전했다.
천부적 권리를 빼앗긴 비극적인 사건인 데다 배상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 입장이 강했던 만큼 승소의 기쁨이 클 것으로 예상했지만 A씨의 태도는 의외로 담담했다.
A씨는 "그때 피해를 본 한센인들의 나이가 지금 70~80세로 대부분 연로하다"며 "배상금 액수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이런 판결이 나왔으니 억울한 것은 푼 셈"이라고 말했다.
느릿느릿 또박또박했던 A씨의 어조는 40년 전 비극적인 얘기를 전할 때부터는 크게 떨렸다.
전남 함평이 고향인 그는 1966년 소록도에 들어왔다.
소록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마을 사람들 몰래 병을 숨기며 골방 생활을 3년째 하던 중 부모님의 권유로 소록도로 들어왔다.
힘든 치료와 격리의 소록도 생활에서 지금의 부인도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했지만 기쁨도 잠시.
당시 소록도병원은 정부시책이라며 한센인이 결혼해 애를 낳으려면 섬을 떠나야 한다고 했다.
생활할 곳이 사실상 소록도뿐이었던 한센인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얘기였다.
섬에 남기 위해서는 낙태를 하거나 단종 시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한센병이 유전된다는 잘못된 믿음이 낳은 정책이었지만 결국 A씨 부부도 2번의 낙태와 1번의 단종 시술을 해야만 했다.
병원측은 낙태를 통해 뱃속에서 꺼낸 아이들을 병에 담아 연구용으로 보관하기도 했다고 A씨는 당시 끔찍한 상황을 전했다.
A씨는 "그때는 그것을 운명처럼 받아들였다"며 "병원에서는 강제가 아니라고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으면 섬에서 나가라고 하니 경제적으로 좋지 않고 건강도 나쁜 한센인들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 조치로 당시 소록도에 들어와 자식을 둔 한센인은 현재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한센인에 대한 이같은 비극적인 조치에 대해 공식적인 배상이 이뤄진 계기는 일본 정부 덕분이었다.
일본 정부가 2006년 한센보상법을 개정해 한국과 대만 등 일제 강점기에 강제격리된 한센인들에게도 800만엔씩 보상하기로 하면서부터다.
여기에 힘을 얻은 국내 한센인들도 한센 인권 변호단과 함께 우리 정부에도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거부로 결국 소송으로 갔고 5년여의 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대법원 확정판결에까지 이르렀다.
A씨는 "우리가 배상을 요구했을 때 정부에서 깨닫고 들어줬어야 했는데 왜 재판까지 갔는지 모르겠다"며 "대를 끊었는데 배상액수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억울함을 풀었다는데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소록도에는 A씨처럼 소송을 별도로 제기한 한센인들이 또 있어 이번 대법원 판결이 자신들의 소송에도 좋은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형철 소록도병원장은 "지난해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이었는데 한센인의 권리를 인정한 소중한 판결이 나와 한센인들 모두 기뻐하고 있다"며 "병원에서도 한센인 인권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해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betty@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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