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호피 3장씩 바쳐라"…그 많던 호랑이는 왜 사라졌나

입력 2017-02-16 08:00  

"매년 호피 3장씩 바쳐라"…그 많던 호랑이는 왜 사라졌나

신간 '조선의 생태환경사'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단종이 즉위한 1452년 우부승지 권준, 공조참판 이사순이 명나라 사신을 만나 호피(狐皮) 40장을 전했다. 그러자 명나라 사신인 김흥은 100장을 청했는데, 40장만 준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호랑이 가죽인 호피는 조선이 중국과 일본 사신에게 건네는 흔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중기까지만 해도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서는 호피 혹은 표범 가죽인 표피를 매년 3장씩 진상해야 했다. 조정이 해마다 거두는 호피와 표피는 1천여 장에 달했다.

하지만 오늘날 호랑이와 표범은 우리나라에서 절멸한 것으로 추정된다. 수백 년 만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이다. 반면 15세기 초반에 약 3만 마리였던 소의 개체 수는 20세기 초 110만 마리로 대폭 증가했다.

김동진 한국교원대 교수가 출간한 신간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500여 년간 이어진 조선시대에 한반도에서 벌어진 환경 변화를 조명한 책이다. 특히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에도 나타나는 호랑이가 이 땅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분석한 대목이 흥미롭다.

저자는 "개국공신인 정도전에게 백성은 하늘이었고, 백성이 하늘로 삼는 것은 먹을거리였다"며 조선이 농사와 가축 사육을 중시하는 경제체제를 유지했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토지였다. 인구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경작지가 필요해졌고, 그 결과 인간은 호랑이와 표범이 서식하던 땅을 잠식해 나가기 시작했다. 15∼16세기에는 냇가에 있는 땅들이 개간됐고, 17∼19세기에는 고산지대에 있는 평탄지와 완만한 경사지가 화전으로 바뀌었다.


조선 조정이 호랑이에게 화를 당하는 호환(虎患)을 줄이기 위해 적극적인 호랑이 포획 정책에 나선 것도 호랑이 감소의 원인이 됐다.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하는 전문 군인인 '착호갑사'(捉虎甲士)는 성종 16년(1485) 440명까지 늘었고, 평안도에서 별도로 운영하던 착호군(捉虎軍)은 현종 15년(1674) 5천명에서 숙종 22년(1696) 1만1천명가량으로 증가했다.

저자는 "영조가 즉위한 1724년 호피와 표피를 바치게 하는 제도가 영구히 폐지됐다는 사실은 이들 동물의 개체 수가 극적으로 줄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라며 "호랑이와 표범의 출산 주기와 평균 수명, 번식률을 고려하면 한반도에는 각각 4천∼6천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이 살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책에는 이외에도 시기별 경작지의 입지와 환경, 숲의 변화상, 미생물로 인해 탄생한 김치와 식초 등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다.

푸른역사. 364쪽. 2만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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