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지난해 우리나라의 가구당 흑자가 2003년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얼핏 좋은 소식 같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소득이 늘어서 흑자가 난 것이 아니라 씀씀이가 줄어서 생긴 '불황형 흑자'이기 때문이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가구당 월평균 가계 지출은 336만1천 원이었고, 월평균 흑자액은 103만8천 원이었다. 연간 단위로 가구당 월평균 흑자가 100만 원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내용을 보면 심각하다. 지난해 가계 소득은 전년보다 0.6% 늘었지만, 지출은 0.4% 감소했다. 가계 지출이 감소한 것은 통계 작성 이후 처음이다. 여기에 지난해 소비자 물가가 1% 상승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제로 지출 감소 폭은 1.4%에 달한 것으로 봐야 한다. 소비침체가 절벽 수준으로 악화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가계 소비 감소의 내용을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허리띠 졸라매기가 어느 정도 심각한지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소비 감소는 대부분의 품목에서 나타나는데 특히 식료품ㆍ비주류 음료의 지출은 통계 작성 이후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이 부분의 지난해 감소 폭은 1.3%였는데, 그동안 식품 소비 지출이 감소했던 때는 2009년(-0.2%), 2013년(-0.3%) 두 번뿐이었다. 이밖에 경조사비 비중이 큰 가구간 이전지출은 무려 4.3%나 줄어든 20만3천 원으로 조사됐다. 역시 관련 통계 작성 이후 최대 감소 폭으로, 경기 침체에다 부정청탁금지법 시행의 영향도 큰 것으로 보인다. 의류ㆍ신발 지출과 통신장비 지출, 자동차 구입, 학원 등 교육 지출도 모두 줄었다. 특히 오락ㆍ문화 지출은 2004년 이후 처음으로 0.2% 축소됐다.
지출이 줄었지만 예금과 적금을 깨는 중도해지 비율은 3년 연속 증가세를 보여, 지난해는 35.7%였다. 낮은 금리도 영향을 줬겠지만, 살림살이가 어려워져 미래를 위한 예금과 적금을 해지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풀이된다. 소득은 늘지 않고 빚이 증가하면서 채무조정을 신청한 사람도 전년과 비교하면 11.7% 늘어나 금액 기준으로 141조 2천억 원에 달했는데, 이 또한 연간증가액으로는 사상 최대다. 특히 20대 이하의 채무조정 신청자 숫자가 전년 대비 16.6% 늘어났다. 젊은 층의 경제적 어려움이 통계 수치로 확인된다고 하겠다.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술과 담배 지출은 2년 연속 증가세를 보였고, 복권 판매 수입이 전년보다 8.4% 늘어난 3조8천억 원을 넘었다. 복권 판매 수입은 2003년 4조2천억 원을 넘은 이후 13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할 것이 확실하다. 복권 중 로또 복권 판매액은 3조 5천221억 원으로 사상 최대였다.
만성적인 소비침체는 경기 악순환을 유발하므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도 이를 인식해 지난주 내수활성화 대책을 발표했지만,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결국, 일자리 확충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백약이 무효일 공산이 크다. 기업의 투자를 통한 고용 능력 확대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고 중장기적으로 일관성 있게 밀고 나가는 방법 외에 다른 묘수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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