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만의 단죄'…"친일파 이두황'을 아십니까"

입력 2017-03-01 04:34  

'100년 만의 단죄'…"친일파 이두황'을 아십니까"

명성황후 시해 가담 인물, 전주 기린봉에 묘 버젓이

(전주=연합뉴스) 임채두 기자 = "친일파 이두황의 죄를 묻기까지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네요."

지난해 8월 13일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는 전주시 중노송동 기린봉 초입에 '친일파 이두황 단죄비'를 설치했다.

이두황이 죽은 지 100년 만이다.

이 비에는 이두황의 친일 행적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훈련대 제1대대장으로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이끌었다.

조선공사 미우라와 일본 자객이 '조선의 국모'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데 길을 열어준 인물이 바로 이두황이다.

항일 의병 투쟁 시기였던 1908년에는 호남 지역 의병들을 초토화하는 데 가담했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일제의 토지수탈을 돕는 등 식민지 정책에도 앞장섰다.

수상 이력도 화려했다. 1912년 일제로부터 경술국치 기념장을 받았고,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에서 유공장을 수상했다. 다이쇼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도 그에게 돌아갔다.

2m가 넘는 단죄비에 빼곡히 적힌 이두황의 친일 행적은 단숨에 읽혔다.






단죄비로부터 365m 떨어진 곳에는 이두황의 묘가 있다.

크기부터 위세를 가진 묘는 비석 높이만 2m에 달하고 제단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다. 묘명은 초대 조선 총독이었던 데라우치가, 비문은 친일파 김윤식과 정병조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두황은 죽어서도 친일의 길을 간 인물이다.

항일 의병을 초토화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공로로 1910년부터 사망한 1916년까지 전북 도정관(현 도지사)을 지냈다.

서울 태생인 그의 묘가 전주에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도 묘 일대의 땅 1만2천여 평은 이두황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 청산의 하나로 친일파 후손의 재산을 환수하기 위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이두황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아픔과 모멸감을 안겨준 인물이다"며 "그의 친일 행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뼛속까지 민족을 배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명박 정부 때 친일 행위자 재산 환수위원회가 해체돼 사실상 친일 후손의 재산을 환수할 방법이 사라졌다"면서 "다음 정부가 들어서면 재산환수위원회를 부활시켜야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부정하게 축재한 친일파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do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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