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영상기술 발달로 치매위험 '무증상 뇌경색' 진단 증가
보험금 지급 두고 분쟁…"질병분류체계 혼란 개선해야"
(서울=연합뉴스) 구자성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교수 = 평소 고혈압에 담배도 피우는 대기업 임원 A(56.남)씨. 그는 혈압약을 꾸준히 먹고 있지만,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돌아가신지라 평소 뇌졸중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그런데, 최근 A씨는 최근 회사 건강검진 프로그램으로 시행한 뇌 MRI(자기공명영상) 검사에서 '뇌 허혈변화 및 뇌경색 의심' 진단을 받았다. 양쪽 대뇌 깊숙한 부위에 하얗게 보이는 작은 점이 미세한 뇌경색 흔적으로 판명된 것이다. 경미한 증상이라 아직 약물치료가 필요한 단계는 아니었지만, 이제부터는 반드시 금연하고 싱거운 식습관으로 철저한 혈압관리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뇌졸중은 A씨처럼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뇌경색과 뇌혈관이 터져서 생기는 뇌출혈을 통틀어 말한다. 대개 뇌혈관이 막히거나 터지면 뇌 손상으로 인한 신경 증상이 나타난다. 신경 증상은 반신마비, 어둔한 말투, 입이 삐뚤어지거나 물체가 두 개로 겹쳐 보이는 경우 등이다.
최근에는 건강검진 때 뇌 MRI 검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검사 기술도 발전하면서 증상이 없는 뇌혈관질환까지 발견하는 사례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기능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부위에 뇌졸중이 생기거나 아주 작은 뇌졸중이라면 자각 증상이 없거나 미미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뇌 영상 검사를 받다가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이를 흔히 '무증상 뇌경색'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미세한 이상까지 진단하면서 새롭게 명명된 질환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고령인구 비중이 증가하는 것도 이런 부분과 무관치 않다.
검사 기술의 발달로 발견하는 또 다른 뇌혈관질환으로는 '만성뇌허혈'과 '미세출혈'이 대표적이다.
만성뇌허혈은 뇌혈관이 갑자기 막히는 뇌경색과 달리 뇌의 미세혈관이 좁아진 상태가 오랜 기간 계속되면서 조금씩 혈액 공급이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정확하게는 '백질만성허혈변화'라고 부른다. 당장 뇌경색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앞으로 뇌경색의 발생 위험이 크고 혈관성 치매의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미세출혈은 뇌의 미세혈관들이 서서히 손상돼 약해지면서 아주 미세한 출혈이 조금씩 발생하는 현상이다. 만성뇌허혈과 마찬가지로 직접 뇌졸중 증상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향후 뇌졸중 발생 위험이 높고 치매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무증상 뇌경색, 백질만성허혈변화, 미세출혈 등은 모두 나이가 들수록 발병률이 증가한다. 미국의 한 연구 결과를 보면 80세 이상 노년층의 약 25%는 무증상 뇌경색이 나타났고, 70세 이상의 90% 이상은 다양한 백질만성허혈변화를 보였다.
하지만 무증상 뇌혈관질환이 노년층에 흔하다고 해서 무조건 뇌 MRI 검사를 받을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한 결론이 없다. 간혹 단순 노화에 따른 혈관 변화를 무증상 뇌경색이나 백질만성허혈변화로 오인하기도 하고 작은 석회화 현상이나 혈관 자체를 미세출혈로 잘못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적인 검사보다는 MRI 결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지난달 미국뇌졸중학회는 무증상 뇌혈관질환 환자의 진단과 관리를 위한 의학적 지침을 발표했다.
환자의 나이와 동반위험인자(고혈압, 당뇨병, 고지혈증, 흡연, 심장질환 등)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의학적 관리를 판단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위험인자가 없고 이상 소견이 경미하면서 젊은 경우에는 별도의 의학적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반면 이상 소견이 심하거나 고령이고 위험인자가 있다면 아스피린 같은 항혈전제를 복용하도록 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장기간 항혈전제를 복용할 경우 출혈 부작용 위험도 증가하기 때문에 반드시 전문가와 상담하고 결정해야 한다. 또 뇌졸중 위험인자 관리는 항혈전제를 복용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하다. 금연하고 혈압과 혈당, 고지혈증 관리만 잘해도 항혈전제 이상의 예방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무증상 뇌혈관질환의 진단이 늘고 의학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뇌졸중 예방에도 적지 않은 효과를 봐온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무증상 뇌경색을 두고 보험사와 환자 간 보험금 지급 분쟁이 생기는 점은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현재 사용되는 국제질병분류기호(ICD-10)에 뇌경색의 질병코드는 'I63'이다. 뇌경색 진단에 있어 발생 시점과 신경 증상의 유무로는 질병코드를 구분하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무증상 뇌경색이 증상이 있는 뇌경색과 같은 의학적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무증상 뇌경색에도 I63을 부여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나 통계청이 발행한 2014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의 질병코드 지침서를 보면 무증상 뇌경색의 하나인 '무증상 열공뇌경색'은 I63을 쓰지 않도록 하고 있다. 열공뇌경색은 아주 작은 뇌혈관이 막혀 발생하는 지름 1㎝ 이하의 작은 뇌경색을 말한다. 이런 연유로 무증상 열공뇌경색으로 진단받으면 보험회사가 진단서에 기재된 I63 질병코드를 인정하지 않고 보험금 지급을 거부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는 증상, 진단, 치료 등에 있어 다른 뇌경색과 별 차이가 없는 열공뇌경색만 제외하는 것으로, 의학적 근거가 없고 법적인 강제력도 모호하다.
심지어 오래됐다는 의미의 '진구성 뇌경색'이라는 진단명을 적용해 지급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한다. 이 진단명은 의학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질병코드 지침서에 I63으로 적용 가능한 것으로 나와 있는 '증상 있는 열공뇌경색'까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도 해 분쟁이 생기기도 한다.
세계보건기구(WHO)의 경우 2018년까지 예정된 국제질병분류기호 개정판(ICD-11) 초안에 무증상 뇌경색을 뇌경색의 범주 안에 넣었다.
국내에서도 이런 분쟁의 소지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2015년 통계청이 주관한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 개정안 진행과정에서 대한뇌졸중학회는 뇌경색 발병 시기에 따라 질병코드를 세분화하는 안을 제안해 긍정적으로 검토됐지만, 최종 단계에서 이해관계 단체의 반대로 결국 안건이 무산됐다.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진단과 치료법의 변화뿐만 아니라 질병분류체계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 더욱 명확한 체계가 마련되기 전까지는 의학적 근거가 미흡한 이해관계 단체의 자의적 판단보다는 전문가의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 구자성 교수는 1991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한 뒤 동 대학에서 신경과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8년부터 1년간 미국 UCLA 데이비드 게펜 의과대학(David Geffen School of Medicine) 뇌졸중센터 방문교수로 연수했다. 현재 서울성모병원 신경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홍보실장을 맡고 있다.
구 교수는 뇌졸중, 두통 분야의 권위자로 꼽힌다. 대한뇌졸중학회 보험이사, 보건복지부 건강보험 전문평가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한뇌졸중학회 보험위원회 위원과 뇌졸중진료지침 집필위원을 비롯해 대한신경과학회 의무이사, 보건복지부 규제심사위원회 위원,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대가치개선 임상전문가 패널,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의사실기시험 심의위원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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