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서 회고전 '50년의 무언극'
(과천=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캔버스라면 일주일이면 그리겠죠. 태피스트리는 한올 한올 쌓아 올라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림이 완성됩니다. 작업 과정의 정직함, 유화는 가지지 못하는 특유의 광채 때문에 태피스트리를 좋아합니다."
경기도 과천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이 화사한 직물들로 뒤덮였다. 유화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실을 짜서 만든 태피스트리들이다. 실을 이용해 색깔과 명암, 그러데이션까지 표현한 작품들에 탄성이 나온다. 탁월한 손 솜씨의 여성 작가가 완성했을 것 같은 이 작품들은 섬유예술가 송번수(74)가 평생 제작한 것들이다.
과천관에서는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작가의 예술 세계를 돌아보는 회고전 '송번수_50년의 무언극'을 10일 시작한다. 원로작가를 소개하는 한국 현대미술작가 시리즈의 4번째 공예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전시 배경에 대해 "송번수의 태피스트리는 한국 현대섬유예술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으나 대중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라면서 "송번수를 재발견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전시에서는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판화와 태피스트리, 종이 부조, 환경조형물 100여 점을 선보인다. 작품들에는 공예학과를 졸업한 뒤 다양한 시도를 통해 판화작가로 입지를 다지고, 석판화를 배우고자 떠난 프랑스 유학에서 태피스트리와 인연을 맺게 되고, 태피스트리 기법을 나날이 발전시킨 지난 세월이 담겨 있다.
9일 과천관에서 만난 작가는 무대에 오른 연극배우처럼 기운이 넘쳤다. 전시장을 휘젓던 작가는 1974년 발표한 실크스크린 판화 '공습경보'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방독면을 쓴 제자의 모습을 판화로 제작, 1970년대 유신정권 아래 숨 막히는 사회 분위기를 비판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고초를 겪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당시 정치인들이 고초를 줄 정도의 레벨이 됐다면 나는 (고초를 당했어도) 오히려 환영했을 것"이라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작가는 시대의 기록자요, 감시자이면서 비판자여야 한다"는 작가의 신념은 1972년 'A.G' 전시에서 7·4 남북공동성명 호외를 확대 인쇄해 400장을 뿌린 퍼포먼스에서도 읽을 수 있다. 'A.G' 전시는 당시 전위예술을 지향했던 한국 아방가르드 협회가 연 전시로, 그는 공예 작가로서는 유일하게 참여했다.
2003년 이라크전 당시 자살폭탄테러 소식을 듣고 제작한 태피스트리 '이라크에서 온 편지'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직접 경험한 뒤 만든 태피스트리 '2011.3.11'처럼 시각을 세계로 넓힌 작품들도 전시장에 자리했다.
송번수는 '장미와 가시'의 작가로 알려졌다. 장미 가시 이미지를 거대한 태피스트리나 판화로 만든 작품들도 이번 전시에 다수 포함됐다. 작가에게 장미는 꽃의 여왕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상징이다. 포크와 나이프에 잘려나간 장미, 수혈받는 장미 등의 이미지를 그린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삶에 대한 개인적 독백이나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은 가시 이미지도 눈에 띈다.
전시는 과천관 1전시장과 중앙홀에서 6월 18일까지 열린다. 문의는 ☎ 02-2188-6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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