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무재조정 동참이 손실 줄이는 길"…우회적 설득만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도 재점화
(서울=연합뉴스) 박초롱 기자 = '최순실 사태'를 계기로 손발이 묶인 금융당국이 대우조선해양[042660] 회생의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의 결정을 기다리며 애를 태우고 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구속을 지켜본 금융당국은 국민연금에 찬성해달라고 요청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문 전 장관은 제일모직과 삼성물산[028260] 합병에 찬성하도록 국민연금에 압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합병에 찬성했다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된 국민연금도 장고를 거듭하고 있다.
대우조선 구조조정 방안을 두고 부처 간 잡음이 흘러나오며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까지 재점화되는 모습이다.
◇ 국민연금 손에 달린 대우조선 채무재조정
대우조선 대주주인 산업은행과 최대 채권자인 수출입은행은 지난 27일 채권단 협의회를 열어 시중은행을 상대로 한 채무 재조정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산업은행은 구체적인 채무 재조정 방안과 신규 자금 지원방안을 설명하며 협조를 요청했다.
시중은행들은 무담보채권의 80%인 5천600억원을 대우조선 주식으로 바꿔서 받고(출자전환), 나머지 20%는 만기를 5년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대우조선의 수주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5억달러(약 5천600억원) 규모의 선수금환급보증 지원도 요청받았다.
시중은행들은 대우조선에 대한 지원을 마뜩잖아하면서도 금융당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채무 재조정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지금까지 대손충당금을 상당히 쌓아 놓았기 때문에 무담보채권이 손실처리 된다고 해도 건전성에 큰 문제가 없는 데다 금융당국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단, 현대상선[011200] 지원 때처럼 사채권자들이 채무 재조정에 동의하면 시중은행도 지원하겠다는 '조건부 지원'을 내걸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대우조선이 넘어야 할 가장 큰 고비는 다음 달 17∼18일 회사채 투자자를 대상으로 열리는 사채권자 집회다.
사채권자들은 국민연금·우정사업본부·사학연금·보험사·증권사 등 기관투자자 70%와 개인 30%로 구성돼 시중은행처럼 일괄적 채무 재조정 합의를 끌어내기 쉽지 않다.
각각 만기가 다른 회사채 채무 재조정을 위한 5차례의 집회 중 1차례라도 부결되면 대우조선 지원방안은 실패로 돌아간다.
사채권자 집회의 키는 대우조선 회사채의 29%(3천900억원)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쥐고 있다. 특히 당장 다음 달 만기가 돌아오는 회사채 4천400억원 중 2천억원 이상을 국민연금이 들고 있다.
대우조선 회사채 1천800억원(13%)을 보유한 우정사업본부와 1천억원을 들고 있는 사학연금(7%), 증권사 등 기관투자자 역시 국민연금의 선택을 따를 가능성이 있어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던지면 채무 재조정이 가결되기 어려운 구조다.
이 경우 대우조선은 법정관리와 워크아웃을 결합한 새로운 구조조정 수단인 프리패키지드 플랜(Pre-packaged Plan)으로 들어가야 한다.
◇ "채무재조정 동참이 손해 줄이는 길"…우회적 설득만
국민연금이 사실상 대우조선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금융당국은 지원 요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최순실 게이트에 휩쓸려 홍역을 치른 가운데 정부 요청이 불필요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순실 사태 이후 정부가 나서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며 "현재 국민연금을 설득할 수 있는 주체는 사실상 대우조선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신 금융당국은 곧바로 대우조선의 채무 재조정 실패 시를 대비한 P-플랜 돌입을 준비하며 "P-플랜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우회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P-플랜은 일종의 단기 법정관리이기 때문에 국민연금 등 금융채무자들은 법원이 강제하는 훨씬 가혹한 채무 재조정 안을 받아들 수 있다.
대우조선과 산업은행은 채무 재조정에 동참하는 게 그나마 손해를 줄이는 길이란 식으로 국민연금을 설득한다는 계획이다.
임종룡 금융위원장은 27일 "연기금에 대해선 대우조선이 주체가 돼 (채무 재조정과 관련한) 설득을 할 것"이라며 "연기금이나 사채권자들이 경제적 실질에 대해 판단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국민연금이 쉽사리 채무 재조정에 찬성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삼성에 이어 또 특정 대기업 살리기에 국민 노후자금이 동원된다는 비판을 우려해서다.
대우조선의 분식회계로 회사채 투자에서 손해를 본 국민연금은 대우조선을 상대로 한 소송까지 검토하고 있다. 내년까지 만기가 돌아오는 대우조선 회사채 9천400억원은 모두 분식회계가 이뤄진 2012∼ 2014년에 발행됐다.
◇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 재점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진해운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기된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까지 되풀이되고 있다.
대우조선 도산 시 국민경제 피해 규모를 놓고 금융위원회와 산업통상자원부가 엇갈린 의견을 내놓으면서다.
지난해 10월 조선업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할 당시에도 산업부는 조선 '빅3' 체제를 '빅2' 체제로 재편하자고 주장한 반면 금융위는 일단 대우조선을 살려 '빅3' 체제를 끌고 가자고 주장했다. 최종 방안에는 금융위 의견이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이번에는 대우조선 파산에 따른 국가 경제 손실위험 추정치를 금융위가 59조원으로 밝힌 상황에서 산업부가 비공식적으로 17조6천억원이라는 다른 숫자를 들고나와 논란이 일었다.
금융위의 '59조원'은 대우조선이 추가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하고 파산해 이미 수주한 선박 건조가 전량 중단된다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피해액이다.
대우조선이 작년 말 기준으로 건조 중인 배는 114척, 32조원 규모인데 이 중 96척에 법정관리 시 선주가 발주를 취소할 수 있다는 조건이 걸려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선주가 발주를 전량 취소하지는 않고 40척 이상 취소 가능한 것으로 회계법인은 추정했다.
산업부의 '17조원'은 대우조선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서도 선박 건조를 위한 자금을 지원받아 일부 선박을 인도한다는 '연착륙 도산'을 가정한 금액이다.
이런 과정에서 지난해 6월부터 구조조정 컨트롤타워인 '산업경쟁력 강화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기획재정부가 사실상 중재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cho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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