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국, 파기된 비자면제협정 재도입 긍정적 논의 합의
말레이, 김정남 시신·용의자 인도 등 모두 내준 저자세 외교논란
(방콕=연합뉴스) 김상훈 특파원 = 김정남 암살 사건 처리를 둘러싸고 단교 직전까지 갔던 북한과 말레이시아가 '인질 외교'를 봉합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북한은 30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말레이시아는 시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있는 사망자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데 동의했고, 쌍방은 두 나라 공민들에 대한 출국금지조치를 해제하며 자국령 내에서 그들의 안전을 담보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또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도 이날 성명에서 "북한에 억류됐던 9명의 국민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받았다"며 "이에 따라 우리도 북한인들이 말레이시아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할 것이며, (김정남의) 시신은 북한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말레이시아는 평양에 억류된 자국민 9명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김정남 시신 인계와 주요 용의자 석방 등 북한의 요구사항을 모두 들어준 셈이 됐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금지된 신경작용제 VX를 이용해 그것도 공개된 장소인 공항에서 테러를 감행하면서 말레이시아는 적잖은 손해를 봤다.
수도인 쿠알라룸푸르가 화학무기 테러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국제적 평판은 차치하고라도 한동안 링깃화 가치가 급락하는 등 홍역을 적잖이 치렀다.
여기에 사건 이후 시신 신원확인과 인도, 용의자 신병 등을 놓고 갈등하면서 북한과 말레이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했다.
특히 지난달 17일 강철 전 주말레이 북한대사는 김정남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앞에서 느닷없는 한밤중 기자회견을 열고 말레이 측이 "적대세력과 결탁했다"는 주장을 펴며 부검 결과를 수용하지 않겠다고 발언해 갈등을 촉발했다.
말레이 측은 이러한 북한의 주장과 시신 인도 요구를 일축하고, 곧바로 18일 북한 국적의 용의자 리정철 체포 사실을 공개하면서 양국 간 갈등은 한층 첨예해졌다.
이후 말레이의 수사 결과 북한이 배후라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지면서 수사 결과를 놓고 나집 라작 말레이 총리까지 가세한 신경전이 이어졌다.
말레이는 강 대사를 불러 항의하고, 평양 주재 자국 대사도 소환했다.
도주한 용의자들의 평양 복귀, 북한대사관의 현직 외교관 신분인 현광성 용의자 지명에 이어 김정남 살해에 사용된 신경작용제 VX가 사용됐다는 말레이 당국의 발표로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어 다급한 북한이 리동일 전 유엔 주재 차석대사를 대표단으로 보내 대화를 모색했으나 말레이는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파기하겠다고 전격 선언했고, 강 대사까지 추방했다. 북한도 이에 질세라 자국 주재 말레이 대사를 '맞추방'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의 이런 양국 간 갈등은 북한이 자국에 체류하는 말레이 국민의 출국을 임시금지하는 '인질 외교'에 돌입하고, 말레이가 이에 맞서 자국 내 북한국민의 출국금지를 지시하면서 숨 고르기에 들어갔다.
말레이 정부로서는 북한에 억류된 자국민들의 안전을 우려해 단교 가능성을 배제했고, 사건의 배후로 지목된 북한도 증거물인 김정남 시신 인수와 용의자 석방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말레이를 더 자극하는 추가 도발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양국은 이후 물밑접촉을 통해 양국의 이해를 반영한 합의를 이루면서 관계 정상화를 위한 합의도 끌어내 주목된다.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된 공동성명은 "양국 대표단이 쌍무관계의 중요성을 재확언했다. 이와 관련해 두 나라는 무사증제(비자면제협정)를 재도입하는 문제를 긍정적으로 토의하기로 했으며, 쌍무관계를 더욱 높은 단계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김정남 암살 사건 처리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측이 일방적으로 파기한 북한과의 비자면제협정을 되살리기 위한 논의가 전개될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자국민 구출을 위해 북한에 '저자세 외교'를 했다는 비판을 받게 된 말레이시아 정부가 국제사회의 이목을 고려해 협상에 난색을 보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한 현지 소식통은 "말레이시아는 북한과 협상을 통해 억류됐던 자국민을 구해냈지만, 용의자로 지목된 북한인들을 풀어주고 사건의 증거인 시신도 북한에 넘겼다는 부담을 안게 됐다"며 "이런 부담이 향후 북한과의 관계 복원을 위한 논의에 적잖은 부담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meolak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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